매거진 글밭

대화를 지켜보며

누구나 노화를 못 피한다

by 김세중

아침 9시 반께 지하철에서다. 1호선 독산역에서 시내 방향 차를 탔는데 한 7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난처함을 하소연했다. 광흥창역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승객은 젊은 층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엔 6, 70대 할머니들도 더러 있었다. 여기저기서 그들이 도움말을 내놨다. 동병상련이라고 노인들이 돕지 젊은이들은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어떤 할머니가 신길역에서 내려 5호선으로 갈아타고 마포로 가라고 조언했다. 마포(공덕역)에서 다시 6호선으로 갈아타고 광흥창역으로 가란 뜻 같았다. 그런데 잠시 뒤 다른 할머니가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합정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고 했다. 사실 어느 방법이나 다 된다. 문제는 도움을 청한 할머니가 신도림, 신길, 마포, 합정 같은 지명을 전연 모르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신도림이 앞으로 몇 정거장 뒨지 신길은 또 몇 정거장 뒨지 도무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도움말을 준 이들은 할머니가 신도림역이 얼마나 남았고, 신길역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안다고 생각하고 도움말을 건넸겠지만 할머니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누가 할머니를 이끌고 같이 내리지 않는 이상 할머니는 길을 못 찾을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도움말을 건네오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듯한 할머니에게 바로 앞에 서 있던 60쯤 돼 보이는 한 젊은 할머니(또는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을 거들었다. "모르면 택시를 타세요." 짧고 단호한 그 말에 당사자인 할머니는 바로 답했다. "돈 없어." 택시를 타라는 말은 알아듣고 즉각 택시 탈 돈이 없다고 답한 것이다. 좋게 보자면 택시 타란 말은 맞는 말이다. 전철역 부근 아무데서나 택시를 잡아 타고 광흥창역 가자면 택시는 정확히 할머니를 광흥창역에 내려줄 것이다.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그러나 택시를 탈 사람이라면 왜 진작에 택시를 타지 않았겠나. 지하철을 탄 건 택시를 탈 여유가 없으니 지하철을 탄 거 아니겠나. 할머니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다.


내가 궁금했던 건 그 여인의 "모르면 택시를 타세요."란 말이 정말 할머니가 길을 잃을까 걱정이 돼서 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뜻이 있는지였다. 할머니가 택시 탈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보고 그 말을 했다면 정말 할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택시 탈 형편이 안 된다고 생각함에도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뭔가. 길을 모르면 집을 나서지 말 것이지 왜 길도 모르며 나와서 헤매냐는 힐난에 가깝지 않겠나.


잠시 후 그 여인의 또 다른 말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할머니가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잘 모르면 경찰서에 가세요." 아마 그녀가 말하는 경찰서는 경찰서는 물론이고 파출소까지 포함하는 말일 텐데 길을 모르면 경찰서에 가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경찰서에 가면 친절히 안내해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동시에 참 황당하다. 지하철역을 나와서 경찰서나 파출소를 찾는 일이 할머니에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아니 이렇게 무책임한 조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난 도저히 그 말의 진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아무튼 택시를 타라는 말이나 경찰서에 가라는 말 모두 할머니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따르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할머니는 신도림역에 자기하고 같이 내리자는 다른 할머니의 말에 따라 신도림역에서 내렸다. 아마 같이 내린 할머니가 합정역 가는 2호선까지는 태워주지 않았을까 싶다. 합정에서 다시 6호선으로 갈아타고 최종 목표지인 광흥창역까지 무사히 갔을지는 알 수 없다.


도움을 청하는 약자의 호소에 외면과 무반응으로 대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껏 보인 반응이라는 것이 도무지 당사자에게 도움이 안 되는 거라면 무반응보다 오히려 못하지 않나 싶다. 아무리 원론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말이다. "모르면 택시를 타세요.", "잘 모르면 경찰서에 가세요."가 과연 상대방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고 한 말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답을 난 아직 얻지 못하였다. 상대방에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저 핀잔 아닌가. 길도 잘 모르면서 지하철을 탔다는...... 낯선 타인에게 그런 핀잔을 마구 날려도 되나. 누구나 노화를 피할 수 없고 인지능력은 감퇴한다. 차디차고 싸늘한 훈수에 마음이 싸해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검사징계법 개정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