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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은 붙여쓰고 '배추 값'은 띄어쓰고

'배춧값'을 피하기 위해 '배추 값'?

by 김세중

일전에 한 신문 역사문화전문기자의 글을 읽고 상당히 놀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미제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말로 북한이 쓰는 용어라서 피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일제시대일제침략기로 쓰면 교열 부서에서 일제강점기로 고치기 마련이고 그래서 아예 ‘한국사의 식민지 시기’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 같은 말로 바꾸어 쓴다고 했다. 이 신문사의 교열 부서가 얼마나 엄격한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오늘 이 신문에서 묘한 띄어쓰기를 보았다.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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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일제침략기 같은 말은 일제강점기로 반드시 바꾸고야 마는 이 신문의 교열부서에서 배추 값은 띄었고 기름값은 붙여쓴 것은 단순한 실수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이것이 오늘 이 글의 주제다.


짚이는 데가 있다. 필자는 이렇게 추론한다. 애초에는 배추값이라 붙여쓰려고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배추값이라 쓰려고 보니 사이시옷 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글 맞춤법 제30항에 따르면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면 앞말의 받침에 사이시옷을 붙이도록 돼 있다. 배추값은 발음이 [배추깝]이지 [배추갑]이 아니다. 뒷말의 첫소리가 [깝]으로 발음된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라 배춧값으로 적어야 한다. 그런데 배춧값으로 적기는 꺼려진다. 사이시옷을 넣은 배춧값이라는 표기가 낯설고 거부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사이시옷을 넣지 않으려면 배추 값이라 띄어쓰면 된다. 띄어쓰는데 사이시옷을 넣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배추 값이라 띄었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같은 신문의 다음 면에는 제목에 기름값이 나온다. 기름 값이 아니고 기름값이라 붙여썼다. 결과는 어떤가. 배추 값은 띄어쓰고 기름값은 붙여썼다. 배추와 기름이 뭐가 다르기에 배추 값은 띄어쓰고 기름값은 붙여써야 하나. 이게 도대체 설명이 가능한가. 다 붙여쓰든지 다 띄어써야 마땅하지 않나.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배추값이나 기름값이나 모두 띄어써야 옳다. 배추 값, 기름 값이라야 한다. 한 단어일 때 붙여쓰는데 배추+값, 기름+값은 두 단어이지 한 단어가 아니다. 따라서 붙여쓰면 안 된다. 배추+값, 기름+값이 왜 한 단어가 될 수 없고 두 단어인가? 배추 값, 기름 값배추 가격, 기름 가격과 같은 뜻으로 배추 가격, 기름 가격이 한 단어가 될 수 없고 두 단어이듯이 배추 값, 기름 값도 두 단어다.


논리적으로는 그러하지만 두 단어도 붙여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언중에게 있다. 두 단어인 기름 값을 아무리 띄어쓰라고 권해도 기름값처럼 붙여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단어라 해도 붙여쓰면 어떤가. 기름값이 두 단어지만 붙여쓰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면 배추값도 두 단어지만 붙여쓸 수 있다고 본다.


배춧값을 피하려고 배추 값이라 띄어쓴 것은 볼썽사나워 보인다. 아무리 고육지책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그러나 배춧값보다는 덜 볼썽사납다. 배추 값(띄어씀), 기름값(붙여씀)의 띄어쓰기를 보면서 사이시옷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배추값, 기름값처럼 붙여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사이시옷 규정을 손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시옷 규정에 매여 배추 값은 띄어쓰고 기름값은 붙여쓰게 되지 않았나. 걷기 열풍으로 전국 곳곳에 둘레길이 생겼지만 둘렛길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고 온통 둘레길이다. 사이시옷 규정은 이미 명을 다했다. 띄어쓰기를 문제삼았지만 실은 사이시옷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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