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밭

친일 잔재란 무엇인가

법조문에 남은 일본 잔재

by 김세중

오늘 연합뉴스에서 눈에 번쩍 띄는 기사를 보았다. 국민 70%가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관한 기사였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읽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잔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잔재라는 건지 얼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사람마다 생각이 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이 권력을 누리고 호의호식하는 것을 친일 잔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것 아닌 다른 무엇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필자는 필자 나름대로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이유가 있다. 다만 친일 잔재라는 말에는 조금 거부감을 느낀다. 친일 잔재보다는 일제 잔재 혹은 일본 잔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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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법조문 때문이다. 이 나라에 법률이 1,700개가 넘지만 기본이 되는 법이 몇 있다.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이 그것이다. 이들 법률은 헌법과 함께 6법이라고 하는 것인데 나머지 다른 법률들과 달리 양이 방대하다. 이들 법은 모두 500개조가 넘고 특히 민법은 무려 1118조까지 있다. 조항의 수가 많은 것은 물론 한 조항, 한 조항이 의미심장해서 해석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법률은 따로 해석이 별로 필요하지 않고 문면 그 자체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들 법률은 문장이 간단해 보여도 속에 담긴 뜻이 매우 깊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하다. 로스쿨생들은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을 배우는 데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들 기본적인 법률의 문장이 일본어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을 제정할 때 일본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대로 옮겨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실상 똑같은 조항도 상당히 많다. 그러다 보니 채 일본어의 때를 벗지 못하고 일본어 흔적이 생생하게 남은 조문이 적지 않다. 일본어 흔적이 생생히 남은 문장은 어떤 문제가 있는가? 그런 조문은 한국어답지 않고 한국어 문법에 맞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어가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민법 제2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第2條(信義誠實) ①權利의 行使와 義務의 履行은 信義에 좇아 誠實히 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1958년 2월 22일 민법이 공포될 때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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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쓰기로 되어 있었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으며 마침표도 찍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법전에는 띄어쓰기도 하고 마침표도 찍었는데 이는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이고 엄밀히 말하면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마침표도 없다. 문제는 일본의 민법 조문이 어떠냐는 것이다.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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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법 조문의 信義に従い를 곧이곧대로 신의에 좇아라고 1950년대에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어 조사 가 보통로 번역되니 신의라 했고 좇을 종이니 従い좇아라 번역한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신의에 좇아라는 말은 국어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좇다권력을 좇다, 명예를 좇다, 부귀영화를 좇다에서 보는 것처럼 목적어의 조사로 을/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신의를 좇아라고 해야 국어문법에 맞다. 나아가 従い좇아라 할 게 아니라 지켜 또는 따라라 했어야 국어다운 표현이었다. 즉 신의를 지켜 또는 신의에 따라라 했어야 했다. 일본어에 얽매이는 바람에 신의에 좇아라는 국어문법에 맞지 않는 희한한 표현이 등장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이게 일제 잔재, 일본 잔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광복 80년을 맞는다. 21세기인 지금도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를 외우고 있다. 무슨 주문 외우듯이 말이다. 민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조문이 전혀 국어답지 않은 괴상한 문장이지만 요지부동인데 이는 언제 바로잡힐까. 민법 제2조 제1항은 일례일 뿐이고 이런 일본어 흔적이 남아 있는 조문이 민법에는 수두룩하다. 당장이라도 국회는 법 개정에 착수해야 한다. 법조문 속의 일본어 잔재를 걷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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