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성공
전날 간 경안천을 또 찾았다. 도저히 다음으로 미룰 일이 아니다 싶어서였다. 어제와 달라진 건 어제는 초월역에서 출발했지만 오늘은 경기광주역에서 출발한 것이다. 어제는 곤지암천을 꽤나 걷다가 경안천으로 접어들었지만 오늘은 줄곧 경안천 따라서만 걸었다. 종착점은 경안천습지생태공원으로 같았다.
어제 곤지암천과 경안천을 다녀와서 경안천누리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경안천누리길은 광주시 청석공원에서 경안천습지생태공원까지다. 이 길을 온전히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기광주역에서 출발했고. 경기광주역을 나오면 신호등을 두 번 건너야 비로소 경안천 산책로에 이른다. 경안천에는 널찍한 자전거용 길과 오솔길처럼 좁은 보행전용로가 따로 있었다. 걷다 보니 넓은 잔디 운동장이 나타났고 청석교를 건너니 근사한 파크골프장이었다. 경안천누리길이 시작되는 청석공원은 청석교 주변 일대를 가리키는 듯했다.
공원을 지나 본격적으로 경안천누리길을 걷는데 경안천메타세쿼이아숲길이 나타났다. 계단을 조금 올라가니 과연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했고 숲속에 산책로가 나 있어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나도 따라 숲속을 거닐다가 나왔다. 바로 앞에 돌다리가 있어 다리를 건넜고 또 얼마 지나니 다시 다리가 있어 건넜다. 드디어 경안천과 곤지암천이 만나는 지점이 가까워졌다. 머리 위로 도로가 지나갔지만 공중에 떠 있어 갈 수 없다. 보행자는 곤지암천을 따라 난 길로 가는 수밖에. 도중에 곤지암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있어 냉큼 건넜다. 길이 있을 것 같아 징검다리를 건넜지만 길다운 길이 아니었다. 좀 더 걸어서 SRC병원까지 가야 하는 걸 너무 일찍 샛길로 접어들었다. 지도상으로는 희망인공습지라는 데였는데 습지 같은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다행히 도중에 큰길로 올라오는 길이 있어 큰길에 올라섰다. SRC병원은 노인전문병원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나무로 담장이 쳐져 있었고 나무 사이로 안이 보였는데 근사한 공원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SRC병원 안 산책로였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한적한 길을 얼마간 걷다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산을 보니 나무계단이 나 있지 않은가. 허난설헌묘 가는 길이었다. 저 계단을 올라 산을 넘어야 허난설헌묘가 있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가볼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경안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부근에 아파트 단지가 있고 길가에 편의점이 보여 그리로 들어갔다. 이제 상점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여기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야 한다. 에너지를 보충할 요량으로 1+1로 맥콜을 사서 들이켰다. 물도 한 병 사고. 이제 본격적으로 경안천누리길을 걷는다. 중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날 때는 차량 소음이 굉장했지만 거길 지나니 다시 조용해졌다. 서하리에 접어들었다. 전날 갔던 길과 달리 마을로 향했다. 신익희 선생 생가를 찾아서다.
서하리 마을은 참 예뻤다. 그리고 꽤나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였다. 신익희 생가 주위엔 뭔가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생가를 곧 찾을 수 있었다. 소박한 기와집이었다. 萬仰亭이라는 글씨가 단아했다. 金昌淑이 쓴 글씨였다. 김창숙이 15년이나 연상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이들이니 친분이 도타웠으리라. 신익희 생가를 나오니 동네 길이 여간 널찍하지 않았다. 서하리농산물공동직판장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하나로마트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오로지 농민들이 직접 만든 농산물들만 판매하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촌을 가로질러 마을 반대쪽에 이르렀다. 서하보로 내려가는 길 부근에 작은 체육공원 같은 게 있었다. 화장실도 물론 있었다. 전날엔 서하보로 내려가 곧장 경안천습지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다르다. 경안천누리길을 걷기 위해 번천리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시 경안천을 다라 북쪽으로 향했다. 한참 오르막을 올랐다 내려오니 무수리였다. 무수리에는 아주 자그마한 나루터도 있었다. 계속 표지판이 나타났다.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이 8km, 7km, 6km 남았다는 표지판 말이다. 그 표지판을 보면 누구라도 그만큼만 걸으면 경안천습지생태공원에 이른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산중 깊숙이 자리한 어떤 집을 지나는데 길이 그만 끊겨 있었다. 비닐 줄이 쳐져 있었고 더는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경안천누리길은 2019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워낙 사람들이 다니지 않다 보니 길은 수풀로 덮여 버렸을 테고 그래서 아예 비닐 줄로 못 가게 막아 놓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만일 무리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을 했을 것이다. 길 없는 산을 헤맸을 테니 말이다. 길은 끊겨 있는데 예전에 만들어 놓은 표지판은 그대로 있다. 그걸 믿고 갔다가 헛걸음하고 되돌아나온 사람이 나 하나뿐일까. 아닐지 모른다. 도로표지판을 무조건 믿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왕복 약 4.5km를 헛수고했다. 되돌아와 서하보를 건넜다. 그리고 드넓지만 차와 사람이라곤 도무지 안 보이고 간혹 자전거가 지나갔을 뿐인 길을 걸어 경안천습지생태공원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수변산책로를 걸었다. 그리고 놀라운 장면과 맞닥뜨렸다. 양수리 방향 경안천에 실로 엄청난 연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경안천습지생태공원 밖이었다. 습지생태공원 안에 있는 연꽃식재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광활한 밭이 눈앞에 나타났다. 한껏 장관에 취했다가 경안천습지생태공원 안으로 들어왔다. 공원 안의 연꽃식재지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하얀 연꽃, 붉은 연꽃이 각 한 송이씩 풍성하게 피어 있어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나옴으로써 7시간에 걸친 경안천누리길 여정을 마쳤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분명 안내 지도에 있는 산길을 따라 광동교에까지 이르고 광동교에서 마침내 경안천습지생태공원에 이르는 경안천누리길을 걷고자 했지만 도중에 길이 끊겨 있었다. 길이 꽤 험했나 보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다니는 이에 풀숲이 우거지고 길은 없어진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경안천습지생태공원 몇 km라는 표지만은 좀 지워두면 좋으련만 그리로 가보겠다고 나선 뜻을 보기 좋게 접어야 했다. 연이틀 경안천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토록 호젓한 자연이 살아 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다음엔 자전거를 타고 한번 와보고 싶다. 그 나름의 흥취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