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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말의 힘겨루기

천안문 대 톈안먼

by 김세중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중국은 열병식에서 각종 최신 무기를 내보이고 시진핑은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 등과 나란히 서서 여봐란듯이 세를 과시했다. 앞으로 세계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자못 귀추가 주목된다. 그런데 말을 전공하는 필자는 매우 신기한 현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병식 행사가 펼쳐진 광장이 베이징 어디인가. 天安門 광장 아닌가. 그리고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여러 나라 정상들과 함께 올라선 곳이 바로 天安門 망루 아닌가. 그리고 이 天安門을 우리 언론에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신문도 매체마다 달랐고 방송도 방송사마다 제각각이었다. 먼저 신문을 보자.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은 톈안먼이라 했다. 이에 반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등은 천안문이라 했다. 톈안먼은 중국어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은 것이고 천안문은 우리 한자음대로 적은 것이다.




방송은 어땠나. KBS만큼은 베이징 현지에서 기자가 보도하면서 또렷하게 천안문이라고 발음했다. 그러나 다른 방송은 달랐다. MBC, SBS는 톈안먼이라 했고 연합뉴스TV, YTN도 톈안먼이라 했다. 방송은 톈안먼이 훨씬 우세한 듯 보였다. 그러나 대표적 공영방송인 KBS는 분명하게 천안문이라 했다. 방송도 둘로 갈린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방송기자들이 분명하게 톈안먼이라 발음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방송의 자막에서는 분명히 톈안먼이라 나왔지만 기자의 발음은 필자의 귀에 들리기로는 톈안먼이 아니라 텐안먼 또는 심지어 텐안문으로까지 들렸다. 을 발음하기가 워낙 까다로우니으로 발음했을 것이고 門의 의미를 떠올려 이라 하지 않고 이라 발음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크게 보아 우리 언론은 天安門에 관해 천안문톈안먼으로 갈려 있었다.


같은 대상을 놓고 언론사마다 다르게 적는 사례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래서 혼란을 막고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위원회도 구성하는 등 꾸준한 노력이 따랐지만 이번 天安門에 관한 보도에서 보듯이 통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신문사, 방송사마다 달리 적고 발음하는 것은 어쩌면 대중들 사이에서 말이 통일되지 않은 것이 그대로 반영된 것일지 모른다.


우선 노장층에서는 단연 천안문일 것이다.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베이징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이른바 천안문 사태였다. 당시 보도는 한결같이 천안문이었고 아마 50대 이상이라면 천안문이 머리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톈안먼은 낯설기 짝이 없다. 그러나 젊은 층에서는 그런 기억이 없다. 그러니 천안문도 좋고 톈안먼도 좋을 것이다. 천안문은 다분히 과거지향적이고 톈안먼은 그 반대로 미래지향적이다.


중국 지명에 관해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원칙이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어 발음에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해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우리 한자음으로 읽는 관행이 있는 말은 우리 한자음으로 읽는 것도 허용한다는 것 말이다. 이에 따라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칭다오가 원칙이지만 북경, 상해, 광주, 청도도 허용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베이징과 북경, 상하이와 상해, 광저우와 광주, 칭다오와 청도는 같이 쓰인다. 노년층이 대체로 북경, 상해, 광주, 청도를 선호하고 젊은 층은 베이징, 상하아, 광저우, 칭다오를 선호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톈안먼이 원칙이되 천안문도 허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세대간의 갈등은 여러 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천안문톈안먼의 힘겨루기도 그런 현상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신문사에도 젊은 기자들과 노장 기자들이 공존할 텐데 보통 의사결정권은 노장층이 쥐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다. 어떻든 각 언론사마다 천안문으로 할 거냐 톈안먼으로 할 거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을 것 같다.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고. 10년 뒤 90주년 전승절에 한국 언론들은 어떻게 보도할지 무척 궁금하다. 천안문을 선호하는 이들은 아마 더욱 줄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점쳐본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톈안먼은 이상하다. 텐안먼이 자연스럽고 편하다. 은 한국어에 없는 소리다. 티엔이라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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