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법 앞에서 무뎌지나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by 김세중

민법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적용 받는 수많은 원칙이 담겨 있는 법률이다. 일테면 일부일처제는 민법 제802조(배우자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에 규정되어 있다. 성년이 19세인 것은 민법 제4조(사람은 19세로 성년에 이르게 된다.) 때문이다. 부동산 매매시 매수인이 중도 해약하고자 할 때는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매도인이 해약할 때는 계약금의 두 배를 매수인에게 줘야 한다는 것도 역시 민법 제565조에 근거한다. 이처럼 민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런 예들은 민법이 얼마나 중요한 법률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민법은 1958년 2월 22일 공포되었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그런데 민법의 수많은 조항 중에는 말이 안 되는 조문이 꽤나 있다. 예를 들면 민법 제162조를 보자.


민법

162조(채권, 재산권의 소멸시효) ①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이런 내용이 민법에 들어 있다는 걸 법조인들이야 너무나 훤히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뜻인지를 법률 문외한인 일반인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설명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다.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된다는 뜻이다. 알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꽤나 어렵게 써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어렵게 써 놓은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렵게 쓴 게 아니라 틀리게 썼다. 소멸시효가 완성한다가 아니라 소멸시효가 완성된다라 해야 말이 된다. 완성한다를 쓰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한다. 작품을 완성하다, 그림을 완성한다 등에서 보듯이 말이다. 그런데 목적어가 없는데 완성한다를 썼다. 완성된다를 써야 할 자리에 완성한다를 쓴 것이다. 단어를 잘못 쓴 것이다.


그런데 1958년에 민법을 제정할 때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로 법이 만들어졌고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대로이니 법조인들은 너무 익어진 나머지 이상한 줄을 모른다. 의문을 품기에 앞서 무조건 받아들이고 외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의문이 스며들 여지가 없어진다. 말이 안 되는데도 말이다.


채권의 소멸에 관한 민법 제506조도 표현이 바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민법 제506도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506조(면제의 요건, 효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무를 면제하는 의사를 표시한 때에는 채권은 소멸한다.


이 조문은 민법 제162조보다도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이상한 줄 잘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말이다. 속뜻은 단순하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그 빚 안 갚아도 돼." 하고 말하면 채권이 소멸한다는 뜻이니 어찌 단순하지 않은가. 그런데 제506조는 왜 이상한가. 채무를 면제하는 의사 때문이다.


우리는 법조문을 읽을 때 이 법조문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파악하려고 애쓰지 말이 문법을 지켰는지를 별로 따지지 않는다. 법조문이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게 보통이다. 법조문의 취지를 이해하는 순간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意思)라는 말은 채무를 면제한다는 의사, 채무를 면제 의사, 채무를 면제하겠다는 의사처럼 쓰일 때는 자연스럽지만 채무를 면제는 의사는 모호하고 어색하다.


민법만큼 중요한 법률이 있을까. 수많은 법률이 있지만 로스쿨에서 가장 힘들여 공부하는 과목이 민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법조문이 잘못돼 있다. 1950년대에 우리말 표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만들어진 법조문을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법조문은 법조인만 알면 그만인가. 법의 적용을 받는 국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려면 말이 되어야 하지 않나. 말이 안 되는 법조문은 바로잡아야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생성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