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자는 범주가 다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한글날을 맞아 혹시 또 한글이 언어라는 말을 누가 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그런 말이 나왔다. 다음과 같다.
오늘은 훈민정음 반포 579돌을 맞는 날이다. 연합뉴스에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을 인터뷰했고 회장이 "인공지능(AI) 시대에 가장 잘 맞는 언어가 한글입니다. 앞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말 회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는지 아니면 기자가 자기 나름대로 표현에 손을 댔는지는 알 수 없다.
즉 회장은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잘 맞는 문자가 한글이라고 했는데 기자가 자기 멋대로 문자를 언어로 잘못 고쳤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 설령 회장이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잘 맞는 언어가 한글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기자라면 언어를 문자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독자가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신문에서 자꾸 한글이 언어라고 하니 은연중 그런 줄 아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 말이 맞는 줄 안다.
언어는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 중국어, 아랍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일본어 등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문자는 한글, 로마자(라틴문자), 한자, 아랍문자, 그리스문자, 키릴문자, 히브리문자, 가나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범주가 아예 다르다. 말하자면 한글이 AI시대에 가장 잘 맞는 언어라고 한 것은 범주를 혼동한 것이다.
긴 인류 역사에서 언어는 문자 앞에 있었다. 언어가 먼저 있고 나서 문자가 생겼다. 문자가 있고 거기에 맞게 언어가 생겨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말이 먼저 있었고 그 말을 적기 위해 글자, 즉 문자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말과 글자가 같을 수 있는가.
말과 글자가 다름은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옹알이부터 시작해서 먼저 단어를 하나씩 익힌다. 맘마, 엄마, 물, ...... 그리고 단어를 연결해서 문장도 만든다. 그래서 의사 표시를 한다. 그러다 빠르면 너댓 살 때 혹은 초등학교에 갈 무렵 글자를 깨친다. 말을 먼저 배우고 글자를 나중에 익힘을 알 수 있다.
말과 글자가 다름은 문맹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문맹자가 드물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문맹이 참 많았다. 죽을 때까지 글을 깨치지 못하고 말만 하고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흔했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입으로 말은 자유롭게 했지만 눈으로 글은 읽을 줄 몰랐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까지 있지 않는가.
언어와 문자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범주가 다르다. 그런데 뒤섞어서 말하니 혼란스럽다. 한글은 AI시대에 가장 잘 맞는 문자일 수는 있어도 언어는 아니다. 만일 누가 한국어는 훌륭한 문자라고 했다면 이상한 사람이라 하지 않겠는가. 한국어는 한국인의 문화, 생각, 정서를 담은 언어지 문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글은 한국어를 적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지 언어가 아니다. 한글날만 되면 반복되는 이 혼란상에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우울하고. 좀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