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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Mar 02. 2024

이름이 '지젤'이라니

세계의 이름 이야기 세 번째

일하는 사람들도 이민자. 방문하는 환자들도 이민자인 클리닉에서 수천 명의 환자들 관리하다 보니 웬만한 특이한 이름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발견한 이름이 '지젤(Gisèle).(클래식 발레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총 2막 중에 1막에서는 평범한 처녀로, 2막은 사랑에 배신 당해 죽음을 맞이한 유령(말하자면 처녀귀신)으로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이 바로 지젤이다) 순간 지젤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잠시 멍했다.


꼬마였을 때의 나는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물론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눈이 나빠진다며 책을 사주지 않으셔서 오빠의 책장을 뒤져 같은 책을 몇 권이고 읽곤 했다. 세계동화전집 중 하나를 빼내서 배를 깔고 누워 읽으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거기에는 이상한 이름의 주인공이, 언젠가 갈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나라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본 적도 유튜브도 없으니 내게 낯선 이름들은 마치 다른 세계 그 자체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는 이민자들의 나라 캐나다에서 살고 있으니 존, 제이크, 멜라니는 말할 것도 없고 디안과 이자벨, 마호메드와 모하메드,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를 긴 이름들... 세계 각국의 이름을 매일 보는데도 나는 간혹 고전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을 보면 현실감각을 잃는다.


어느 날 저녁, 몰도바에서 온 나의 동료 로디카는 창밖으로 휘날리는 눈발을 보며 큼직한 머플러를 둘렀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는 걱정스러워 보였다. 갈색 부츠에 초록색의 코트를 입고 퇴근길을 재촉하는 그녀를 보는 내 입에선 낮은 목소리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나타샤"


그녀는 긴 금발을 머플러로 감싸 쥔 채로 눈보라 속으로 걸어 나갔고 나는 톨스토이 소설 한 장면에 남겨진 것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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