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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Feb 19. 2024

조지 왕의 노래 'You'll be back'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

무대가 시작되기 전 조지 국왕의 지엄하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국왕 조지 3세입니다. 해밀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휴대폰을 비롯한 모든 전자기기는 꺼주십시오.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무대를 즐겁게 봐주세요.' 


그것은 공연이 시작도 하기 전에 관객들에게 가벼운 웃음을 주었다. 정중하지만 뮤지컬 해밀턴을 '나의 무대 (my show)'라고 부르는 오만함이 이미 캐릭터를 설명하고도 남았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중 하나인 해밀턴에서 조지 왕은 세 번 나와 짧은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그나마 같은 곡에 가사만 바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해밀턴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대척점을 가진 배역으로 가지는 무게감은 충분했다. 

뮤지컬 해밀턴을 작곡하고 주연을 맡았던 린 마누엘 머랜다는 해밀턴의 전기를 2장까지 읽었을 때 이걸 뮤지컬로 옮기는 방법은 힙합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른 배우들이 독립운동의 정신을 힙합과 R &B로 담아 강렬하게 무대를 이끌어 나가는 사이, 조지 3세는 은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한다. 마치 떠나가려는 연인을 설득하는 것처럼.


[조지 국왕의 노래 첫 번째 파트]

You say

너는 말하지
The price of my love's not a price that you're willing to pay

내 사랑의 값을 치르고 싶진 않다고
You cry

너는 나를 바라보며
In your tea, which you hurl in the sea when you see me go by

네가 바다에 내던져 버린 차 위로 눈물을 떨궜지

Why so sad?

왜 슬퍼하는 거야?
Remember, we made an arrangement when you went away

네가 멀리 떠나면서 나와 맺은 약속을 기억해 봐
Now, you're making me mad*

날 화나게 하는군
Remember, despite our estrangement, I'm your man

우리 사이가 멀어졌어도 나는 너의 남자란 걸 기억하렴

You'll be back, soon, you'll see

넌 곧 돌아올 거야, 두고 봐
You'll remember you belong to me

넌 내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낼 거야
You'll be back, time will tell

시간이 지나면 알게 돼, 넌 돌아와
You'll remember that I served you well

내가 네게 잘해줬다는 걸 깨달을 테니까
Oceans rise, empires fall

바다는 솟아오르고, 제국은 몰락하네
We have seen each other through it all

우린 함께 많은 일을 겪어왔지
And when push comes to shove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면
I will send a fully armed battalion to remind you of my love!

무장한 군대를 보내 내 사랑을 일깨워주겠어

Da-da-da, dat-da, dat, da-da-da, da-ya-da
Da-da, dat, dat, da-ya-da
Da-da-da, dat-da, dat, da-da-da, da-ya-da
Da-da, dat, dat, da-ya

....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내용은 잔혹하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값 (price of love)'이란 국민이 국가에게 내야 할 세금, 그야말로 돈문제였다. 프랑스와의 식민지 전쟁으로 재정문제를 안게 된 영국은 그 부담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시키려고 했고, 이 노래의 골자는 국왕이 국민에게 세금을 안 내고 버티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바다에 차를 내던졌다는 말은 물론 미국 독립전쟁의 발화점이 된 보스턴 차 사건 (Boston Tea Party)를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을 잘 들여다보면 실은 영국이 차에 세금을 많이 매겨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동인도회사가 차를 직접 납품하게 함으로써 비싼 차의 가격을 대폭 낮추게 되자 홍차 밀수업자가 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을 하고 배에 침입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당시 미국의 리더들은 오히려 이 사건을 부끄럽게 여겼다. 조지 국왕이 의기양양하게 이 일을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식민지 지배를 더욱 억압적으로 펼쳐 더 큰 반발을 낳았고 결국은 독립전쟁 (Revolutionary war)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조지 3세는 폭군이었을까?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브리저튼'에 나온 샬럿 왕비의 남편이 바로 조지 3세이다. (평생 정부 하나 두지 않고 샬럿 왕비와의 사이에 15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았다) 검소하고 소탈해서 농부왕 (Farmer King)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식민지 미국의 적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루이 16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필 그 자리에 서서 맹렬한 시대의 흐름을 맞았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여기에서 mad는 화가 난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실제로 조지 3세는 말년에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중의적인 표현이다


뮤지컬 해밀턴을 관통하는 정신은 미국 건국의 역사이기 이전에 인간의 혁명정신이다. 그래서 대부분 실존인물이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3세를 제외한 다른 배역에는 백인 이외의 배우를 섭외했다. 물론 무대예술이라는 특성상 인종에 관계없이 캐스팅하는 관행을 따랐다고도 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뮤지컬의 유일한 백인인 조지 3세는 억압과 구태의 전형을 상징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히스패닉, 흑인, 아시안의 등장인물들은 혁명을 준비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독립전쟁에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준 요크타운 전투에서 라파예트 후작과 해밀턴은 이렇게 말한다.


Immigrants: we get the job done (이민자인 우리는 해내)


해밀턴은 영국과 프랑스, 스코틀랜드계의 백인이었다. 그리고 '이민자'였다. 물론 당시의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 거나 그들의 자녀였을 것이다. 그것이 잉글랜드에서든 아프리카든, 자의로든 타의로든, 언제 다시 돌아가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여정을 떠나 터전을 잡고 아이들을 키울 그곳, 아마도 머랜다는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고 혁명으로 세운 나라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역할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지 워싱턴의 카리스마를 흑인 배우가 내뿜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스카일러 가문의 당찬 맏딸 안젤리카는 흑인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의 조용하고 헌신적인 아내 일라이자는 아시안으로 발탁하는 것은 (2023년 내가 보았던 공연은 한국인인 스테파니 박이 맡아서 훌륭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인종 간의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음 세대의 혁명을 생각해보게 하는 그런 무대였다.


린 마누엘 머랜다가 론 처노의 베스트셀러 전기를 바탕으로 뮤지컬을 제작했다고 하지만 극적인 흐름을 위해 왜곡된 내용이 상당수 있다. 예를 들어 안젤리카는 동생이 알렉산더 해밀턴과 결혼할 당시 이미 기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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