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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Dec 29. 2023

자식을 잃은 자의 이름

문득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If there is no family, there is no upkeep. It is estimated that 75 percent of almost one thousand tombs in St. Louis Cemetery No. 1 are orphaned.'


뉴올리언스의 세인트 루이스라는 유명한 공동묘지에 관한 글이었다. 뉴올리언스는 늪지대여서 땅을 파서 묻는 대신 땅 위에 무덤을 지어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묻힐 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나마 돌볼 자손이 없어지면 그대로 방치돼서 천 개 가까운 무덤 중 75%는 '고아가 됐다'는 것이다. 


부모를 잃은 '고아'를 뜻하는 orphan이 동사로 활용된 표현인데 생각해 보면 부모가 없어 자식이 남겨진 게 아니라 자손이 없어 조상이 방치된 것이니 거꾸로 된 표현이다. (upkeep이란 단어도 '유지(maintenance)'라는 뜻으로도 쓰지만 양육비의 의미도 있다) 그럼에도 orphan이라는 단어가 가진 본연의 기능, 즉 돌봐줄 가족이 없어진 누군가에 대한 의미는 분명하다.


흔히 듣는 이야기로, 부모를 잃으면 고아, 배우자를 사별하면 과부나 홀아비로 부르는데 자식이 죽은 이를 지칭하는 단어는 없다고들 한다. 그만큼 자식 잃은 슬픔이 커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는 이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고아나 과부, 홀아비는 결핍을 의미하고 있으며 '구휼'의 대상이지만 자식은 다르다. 아이는 부양의 대상이니까. 더구나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에 과연 자식 잃은 이를 부르는 단어가 필요했을까? 최장수 임금이었던 영조의 자녀 14 중 5명이 4살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왕실에서조차 이런데 일반 백성의 삶이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 잃은 부모를 일컫는 단어가 없는 이유에 대한 믿음이 저렇게 자리잡은 것은 아마도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큰 두려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존 큐'에서도 댄젤 워싱턴은 '자식이 부모를 묻어야지, 부모가 자식을 묻어선 안 된다'라고 절규하지 않던가. 그래서 아이를 안고 화재 현장에서 뛰어내린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나 이해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닐까? 그 아이가 훗날 아버지의 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그저 행복하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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