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퀘벡 대학에서 프랑스어 단어를 배우는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오랫동안 몬트리올에 살면서도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를 체계적으로 외우게 해서 꽤나 유용했지만 때로는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한다고?'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중에는 동식물 이름들도 있었는데 동물들은 대체로 아는 애들이었지만 식물은 사전을 찾아봐도 대체 어떻게 생긴 애들인지 검색을 해도 모를 것들도 많았다. 우리말로는 단어가 없어서 잎사귀 모양을 그려가며 외우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보기 힘든 종류일 뿐,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흔히 보는 나무니까 알아야 하는 게 당연했다.
셜록 홈즈라든가 미스 마플의 이야기를 즐겨 읽던 어린 시절, 나는 소설 속에 나오는 '너도밤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어떻게 생겼길래 '너도 밤나무야'라고 인정하는 이름을 붙였던 걸까. 밤나무와 너도밤나무는 같은 참나무과지만 너무 다르다고 한다. 열매는 밤이라기보단 잣처럼 생겼는데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의 없게 이름 지은 나무가 유럽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종류이고 생장에 필요한 조건만 잘 맞으면 50미터까지 자라나 좋은 목재가 된다. 바로 나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비치(Beech)다. 우리나라에도 아주 없는 종은 아니어서 울릉도에 서식하는 너도밤나무 군락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살면서는 너도밤나무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 알 필요가 없지만 유럽에 산다면 반드시 외워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어렵게 수업을 듣고 있는데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위블로 Hublot, 배의 창문이라는 뜻이란다. 평생 크루즈 한 번 타본 적 없는 내가 그냥 창도 아니고 '배의 창문'이 불어로 뭔지 알아야 한다고? 억울했지만 시험을 보기 위해 외웠던 그 단어를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했다. 에어 캐나다 비행기의 창문에 작게 쓰인 안내문에서였다. 그러니까 위블로는 배의 창문이지만 비행기의 창이기도 했다. 아마도 서양인들에게 비행기는 수없이 많은 전설과 동화에 나오는, 날아다니는 배의 연장선인 것은 아닐까?피터팬의 배는 런던 하늘을 날고, 일본에서는 은하철도 999가 날아간다.
그렇게 위블로를 알아둬야 하는 프랑스어 단어로 받아들인 지 몇 년이 지나 오늘, 아주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발견했다. 도쿄 긴자 쇼핑거리에 크게 시계 브랜드 위블로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남자 시계에 관심이 없어 몰랐던 모양이다. 시계와 위블로가 무슨 관계인가 싶어 찾아보니 이 회사의 시계 모양이 옛날 프랑스의 범선 창문처럼 생겨서란다.
위블로를 돌아 조금 더 가다 보니 유니클로 플래그십 매장이 보인다. 12층짜리 건물 전체를 유니클로 브랜드가 사용하고 있는데 1층에 꽃을 팔고 있고 색색깔의 셔츠가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플래그십', 그러니까 옛날 유럽에서 먼 길을 떠나면서 함께 출항하는 여러 척의 전함 중에 사령관이 있는 배에 깃발을 달아 그 배가 플래그십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 브랜드를 대표하는 가장 좋은 상품이나 매장을 플래그십(flagship)이라고 부른다.
'배송'을 의미하는 '쉬핑 shipping'이라는 단어도 생각해 보면 운송수단에 관계없이 영어로는 쉬핑이다. 그렇게 보면 서양에서의 '배'라는 것은 물자의 수송과 전쟁, 미지의 대륙으로의 모험을 망라한 중요한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공항 역시 공중의 항구, 에어포트였다.비행기도 '항로'를 따라 '운항'을 하는 일종의 배여서 때로 '결항'도 하고 '회항'도 한다.비행기는 왜 왼쪽으로 타고 내릴까? 일설에 의하면 노를 젓는 사람들이 주로 오른손잡이가 많은 관계로 왼쪽으로 배를 대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위블로라는 단어 하나로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보니 이 글을 도쿄에서 교토로 가는 신칸센 안에서 쓰고 있었다. 만약 비행기가 처음 발명된 곳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의 나라였다면 아마도 관련된 용어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고 나는 위블로라는 단어를 외우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