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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Jul 18. 2024

진보초의 고양이서점

캐나다 주민의 일본여행기 4

   "엄마!"

    누군가의 목소리에 또 습관적으로 뒤돌아보다 여기가 캐나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런데 한국도 아니고 일본인데 왜 '엄마'를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까? 관광지를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도쿄에 사는 사람보다 외지인이 훨씬 많은 장소를 찾아다니다 보니 어떤 때는 길을 찾을 필요도 없이 사람들의 물결을 타기도 했다. 어딜 가나 한국인들이 있었다. 오래된 절과 신사, 전망대, 그리고 디즈니씨. 관광객에 휩쓸려 다니던 어느 날, 도쿄 사람들이 사는 도쿄의 거리가 보고 싶어서 혼자 진보초를 가보기로 했다. 


    IBM 신입사원 시절, 출장으로 종종 가던 도쿄에서 지하철을 탈 때면 종종 지나던, 늘 재미있다고 생각하던 지하철역의 이름이 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그곳에 내렸다. '오차노미즈', 여태 お茶ノ水인 줄 알았는데 御茶ノ水였다. 발음은 같지만 후자는 군주에게 바치는 찻물이니 역이름의 유래가 확실하다. 하천 북쪽에 있는 사찰인 고린샤에 흐르는 물을 에도 막부의 2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바쳤었다고 한다. 히데타다는 수해를 예방하려고 하천 준설사업을 벌여 오차노미즈는 지금과 같이 골이 깊은 지형이 되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로 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데 원래는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셋째였고 정실부인의 자식도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적장자인 첫째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를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자결시켰고, 둘째인 서자 유키 히데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유키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히데타다가 도쿠가와 가문을 이어받아 다음 쇼군이 되었다. 그와 결혼하는 것이 2011년 NHK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고우-공주들의 전국'의 주인공, 고우다. 히데타다에게는 두 번째, 고우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히데타다의 첫 번째 아내 오히메는 고작 여섯 살이었고 곧 요절해 버렸으니 사실상 그녀가 처음이라 봐도 무방하다) 연상이었던 고우(江, 에요江与, 법명: 스겐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 자리가 공석인 상태였으므로 에도 막부의 첫 번째 미다이도코로(쇼군의 정실)가 되어 2남 5녀를 낳았다. 이렇게 말하면 남부럽지 않게 산 여성인 것 같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센고쿠 시대의 정점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어른들에 의해 이혼도 했고 전쟁통에(임진왜란) 사별도 했으니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다. 어제의 사돈이 오늘의 적이 되고, 부모의 원수에게 시집가는 일이 빈번했던 시대였다. 

건너편 다리가 스즈메가 뛰어내린 히지리바시다

    하지만 요즘의 오차노미즈는 센고쿠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야기보다는 '스즈메의 문단속'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역에서 나와 다리에서 내려다보니 그 지형이 특이해서 스즈메처럼 스케일이 큰 에니매이션에 등장할만했다. 에도 시대에는 무사들의 거처가 몰려있었다는 이 지역에 지금은 메이지 대학을 비롯한 여러 학교과 병원 시설이 밀집해 있다. 통행량에 비해 낙후된 시설의 오차노미즈역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목표로 시작됐던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세기에 그려진 오차노미즈의 모습

    얼마를 걸었을까, 악기상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보초는 헌책방으로 유명하지만 기타와 드럼, 현악기 등 악기전문점이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뒤로해서 더 가다 보면 핑크빛 입구에서 시작하는 사쿠라도오리에 전통적인 문양의 종이 등을 파는 문방구 등 특색 있는 상점들이 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근방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드럼 전문점
사쿠라 도오리의 입구
수작업으로 만드는 종이, 와시(和紙)

    진보초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안목 있는 이들에게는 천국인 헌책방 거리다. 현대적인 빌딩들 사이에 오래된 서점들이 용케 살아남아 문을 열고 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의 피해를 크게 입고 난 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는 이 거리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주변 대학 학생들에게는 물론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사랑받았다.

서점은 아니지만 묘하게 시선을 끌었던 모퉁이 건물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야구치 서점

    서점이 있는 곳에 물론 출판사도 몰려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슈에이샤(集英社)로 소년 점프를 비롯한 잡지도 발행한다. 우리 X세대가 국내에 제대로 된 패션잡지가 없던 시절 (사진만) 즐겨 보던 '논노'도 이 회사 상품이다. '스파이 패밀리' 같은 요즘 애니메이션 관련 전시회라도 혹시 있을까 해서 기웃거렸더니 나 같은 여행객이 많은 모양인지 경비 한 분이 나를 보자마자 묻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쇼에이샤 1층 쇼윈도의 '블루엑소시스트'

    거리를 걷다 지친 나는 지극히 평범한 커피숍, 도투루에 들렀다. 아이스커피 한 잔 마시고 금방 나올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에 휩쓸려 랩탑을 열고 글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옆에는 60대 정도의 남성이 서류가방과 샌드위치를 들고 와 앉았다. 다른 쪽에는 할머니 한 분이 노트에 뭔가를 적고 계셨다. 나는 이곳이 진보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커피와 함께 받아 든 쪽지를 다시 보았다. 90분까지만 앉아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혼자 앉아 책을 읽거나 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매장 안에는 보사노바 음악이 흘렀다.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일본에서 책은 근본 본(本) 자를 쓴다. 그래서 서점은 書店(しょてん)이라고도 하지만 '홍야(ほんや)'라고도 부른다. 우리말의 제본, 단행본, 양장본 같은 단어에 '本'자가 들어가는 것은 일본어의 영향일 것이다. 무려 일본의 나라 이름에 들어간 그 글자, 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으면 '혼(本)'이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에 갈 때마다 부럽게 느껴지는 것 하나가 바로 책에 대한 존중과 열정이다. 출판시장의 규모는 물론이고 서점에 가보면 별별 책이 다 있다. 

  고양이책 전문점을 찾아 나섰다.  집에는 이미 의욕만 앞서 사놓고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한 일본어 책이 여럿이었다. 책을 살 생각보다는 특이한 서점을 구경이라도 할 셈이었다. 아무리 서점이 작아도 어떻게 고양이에 관한 책으로만 채울 수 있을까 했는데 '냥코도'에는 정말로 고양이밖에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할아버지 한 분이 "괜찮으니까 천천히 둘러보라"라고 하신다. 한 눈에도 나는 고양이서점이 신기해서 찾아온 여행자였던 모양이었다.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들어간 메모장을 사려고 하자 같은 작가의 책이라며 책장에서 작은 책 한 권을 찾아서 보여준다. "제가 아직 일본어서 서툴러서요"라고 했더니 빙긋이 웃으며 메모장에 있는 것과 같은 그림의 엽서를 쓱 봉투에 담아주셨다. 원래는 그 책을 사는 사람에게 주는 거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나야말로 고맙다"며 다음에 또 오라고 한다. 그 마법 같은 한마디에 언젠가 그 가게엔 다시 가게 될 것 같다.


* 뒷이야기

일본의 70대와 한국의 70대는 어떻게 다를까? 1950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라고 한다면 한국은 전쟁으로 초토화되었던 시기였고 일본은 그 시대를 발판으로 성장하던 때였다. 단순히 책읽는 문화를 부러워 하기에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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