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무기력과 허무와 내일 없음을 사랑해.

#이상의 편지 #너무 한낮의 연애

by 모스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발판 삼아 단단해진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상처가 없었더라도 결국 잘 자랐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상처 없는 삶을 더 귀하게 여기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상처로부터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시인 이상이 연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얼마 전, 연인 h의 핸드폰 배경에서 시인 이상의 편지 구절을 보았다. “나는 당신을 상처 없이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전부터 h가 내게 보내주던 편지들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그 편지 속엔 늘 비슷한 고백이 있었다. 당신은 나와 달리 그다지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고, 남은 삶에 큰 미련이 없다고. 그 말들은 배경화면의 문장과 맞물리며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h가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너는 더 성장해야 해”라는 다그침이 아니라,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위로가 아니었을까. 세상은 늘 우리에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멈춤과 무기력조차 사랑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녀의 무기력과 허무, 내일 없음에 가까운 말들은 내게 선언처럼 들리기보다는, 뜨겁게 타올라 버린 뒤 남은 재의 넋두리처럼 다가왔다.


나는 안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나와 닮은 사람이라는 걸. 나 역시도 꾸준히 성장하는 삶을 지향해 왔지만,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붙잡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 속에서, 그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던 날들. 그때의 내가 겹쳐졌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내 그림자를 다시 불러내는 듯했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꼭 반드시 열심히 살아야 할까. 꼭 살아야만 하는 걸까. 지금은 내 안에서 옅어진 질문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짙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인생은 구불구불한 선으로 이어진, 위아래로 진동하는 sin파와 같으니까. 지금은 그 sin파의 위쪽에 있는 순간으로써 길을 되돌아보면, 그동안의 여로는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토론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절망 속에서 삶의 의지가 사라질 때면 나는 내 생각을 끊임없이 의심했다. 지금 너의 생각만이 답은 아니라고.. 네가 모르는,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거라며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버티다 보면 조금 괜찮아졌고, 그때부터는 내 생각을 다시 수용하고 지지해 줬다.


그 일련의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 덕분에 지금은 앞선 질문과 잠시 멀어졌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인 내게 “왜 살아야 하는가”는 여전히 의미 있는 질문이지만 그 질문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던지고 싶은 문장은 아니니 말이다. 그 이후부터는 힘든 순간이 다시 와도 예전만큼 흔들리지는 않는다. 인생은 원래 오르내림의 연속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지금도 나는 반드시 열심히 살아야 할까. 꼭 살아야만 하는 걸까.라는 물음의 선명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예전과 다른 건, 답을 알지 못해도 괜찮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열심히 살아야만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도 삶은 흘러간다. 중요한 건 그 모호함 속에서도 오늘의 내가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일의 내가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다.


이 글이 과거의 나에게 닿기를 바란다. 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헤매던 시절의 나에게, 부족하고 지쳐도 괜찮다고, 그럼에도 살아보자고 말해주고 싶다. 부족함은 잘못이 아니라 삶의 결이고, 그 결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칠흑 같은 밤을 걷고 있는 h에게도 닿기를 바란다. 당신은 종종 내게 말했지.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고, 남은 삶에 미련이 없다고. 그 말은 내게 ‘나는 이제 다 탔다’는 푸념처럼 들리곤 했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니, 어쩌면 당신이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대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나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내일을 살아내지 못할 만큼 무기력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거라고. 당신이 내일을 믿지 못해도, 나는 내일의 우리를 끝내 믿고 싶다고. 사랑은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족하고 흔들리는 오늘을 그대로 껴안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오늘을 버텨내고, 내일을 다시 살아보면 된다.


김금희 작가님의 '너무 한낮의 연애' 속 한 구절을 빌려 당신에게 고백한다.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


그것까지도 당신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없어도, 성장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당신을 지켜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