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척하며 살아온 시기가 있나요?
흑백요리사 2를 보며 오래 마음에 남은 말이 하나 있었다. 결승에서 최강록 셰프가 했던 이야기였다. 조림핑, 연쇄조림마와 같은 수식어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조림을 잘하는 척을 하며 살아온 시기가 있었다는 말. 그리고 마지막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였기에, 그 요리만큼은 더 이상 척하고 싶지 않았다는 고백. 그 말이 오래 남았다. 화려한 기술이나 결과보다, 그 한 문장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척’을 하며 살아간다. 잘 아는 척, 괜찮은 척, 단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때로는 그 척이 나를 보호해 주고, 때로는 그 척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처음부터 완전히 솔직한 얼굴로 세상에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에 익숙해지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척하는 인생’이 꼭 위선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나 자신을 잘 모르기에, 혹은 알지만 드러낼 용기가 없기에, 우리는 역할을 먼저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 역할 속에서 방법을 배우고, 기술을 익히고, 버티는 법을 터득한다. 문제는 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느 순간 내가 그 척을 선택한 건지, 아니면 그 척에 갇힌 건지 헷갈리게 된다는 점이다.
최강록 셰프의 말이 인상 깊었던 건, 그가 조림을 잘하는 척을 했다는 고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척이 나쁘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그 시간을 부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위한 요리’ 앞에서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는 태도, 그 태도가 마음에 남았다. 그건 척을 버리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나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은 있다. 남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평가를 위한 결과가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무언가를 마주하는 순간. 그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동안 자연스럽게 해 오던 척이 어색해진다. 잘하는 척을 하자니 공허해지고, 괜찮은 척을 하자니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지켜왔고, 무엇을 숨겨왔는가.
어쩌면 성장이란 척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 아니라, 언제까지 척해도 되는지 스스로 아는 일이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는 역할로 살아도 괜찮고, 어디부터는 더 이상 속이지 않아야 하는지 구분할 수 있는 감각 말이다. 그 감각이 생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조림을 잘하는 척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그 순간이, 하나의 기술을 내려놓은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를 선택한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는 척도 하고, 버티는 척도 하고, 괜찮은 척도 한다. 아마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다만 언젠가 나를 위한 무언가를 앞에 두게 된다면, 그때만큼은 나도 그런 선택을 하고 싶다. 잘하는 척이 아니라, 솔직한 상태로 서는 것. 멋있어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나로 충분한지 묻는 것. 척해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되, 그 시간에만 머물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