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내 나이가 부모님이 나를 낳았던 때와 가까워졌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서부터인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와는 달리 결혼을 반드시 거쳐야 할 삶의 단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한층 옅어진 듯하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말 역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 앉아 있다 보면 결국 시선은 현재로 돌아온다. 나의 연인, 그리고 진행 중인 사랑에 대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외로움을 타지도 않았고, 혼자서도 하루를 채울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은 늘 있었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도 발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한때는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완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느끼지만, 지나고 나면 또렷이 남는 기억은 많지 않다고. 반대로 여행과 같이 낯선 경험이 많은 시간은 실제보다 더 길게 느껴지고 오래 기억된다고 했다. 그것이 엄밀한 의미의 심리학적 사실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말은 내게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연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시간의 밀도가 분명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금세 시들어버리는 것을 왜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꽃집 앞을 지나칠 때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꽃집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괜히 안을 들여다보고, 마음에 드는 꽃이 있는지 기웃거리기도 한다. 혼자였다면 끝내 모르고 지나갔을 풍경이다.
그녀는 본디 인디 음악과 최신 곡을 주로 듣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턴가 내가 좋아하던 오래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산울림의 <청춘>이나 <회상> 같은 노래를 무심히 흥얼거리는 모습을 처음 들었을 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오래 남았다. 누군가가 나의 시간을 건너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삶의 초상을 바꿔 놓는다. 거창한 사건보다도 이런 사소한 변화 속에서 말이다. 서로를 바꾸려 한 적은 없지만, 어느새 둘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가 되었다.
그전의 나는 혼자서도 완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완전함은 작은 우물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안정적이지만 경계가 분명한 세계. 둘이 되는 일은 그 경계를 허무는 일이었다.
함께가 되면서 어쩌면 삶은 오히려 조금 더 불완전해졌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감정을 고려해야 하고, 내 방식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늘어나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도 찾아온다. 그럼에도 삶은 이전보다 분명 더 풍부해졌다. 혼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초상들이 생겨났고, 통과하는 감정의 결 역시 훨씬 다양해졌다. 완벽함은 조금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대신 기억할 만한 순간들은 더 많아졌다.
나는 여전히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혼자일 때의 완전함과 둘이 되었을 때의 확장은 서로 다른 종류의 가치라는 것을.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렀다면 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내 삶은 이전보다 넓어졌다. 현재의 나는 이것을 성장이라고 기록한다.
나는 혼자서도 완전하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세계를 만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기꺼이 불완전해졌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은 나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 일련의 과정이 사랑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