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소유자
생각보다 잘하잖아?!!
이사를 준비하면서 <짐 정리하고 버리기> 계획을 세워보았다. 비록 제 멋대로 인간이지만 입주 날이 정해지자 급하게나마 체크리스트가 완성된 것이다.
버릴 짐 목록, 중고거래 물건, 싸야 할 짐 리스트, 필요한 박스 사이즈 체크, 구매 등등
노션에 착착 리스트를 적고 있으니 문득 "생각보다 잘하잖아??"라는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집 안 곳곳에 10년간 묵은 짐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 채..
노션 리스트만 적어 넣고 가벼운 마음으로 본격 짐 싸기를 미뤄두었다.
당근! 따뜻한 후기가 도착했습니다.
근 10년간 친구와 살면서 짐은 무한으로 증식해 집을 삼켜버렸는데 책상부터 시작해 사모은 자잘한 물건들을 새집으로 데려가기엔 그들은 너무 많고 무거웠다.
그리하여 아예 못쓰게 된 물건들을 제외하고 상태가 괜찮은 아이들을 선별하여 당근거래 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당근 할 아이는 나의 출퇴근을 1년 넘게 책임져 왔으나 바퀴가 고장 나서 베란다에 오래 방치되어 있었던 전동킥보드이다. 고장 난 바퀴를 수리하려면 번거로울 테니 그냥 '무료 나눔'으로 결정했다.
역시 올리자마자 바로 반응이 온다. 당근 +4
다음으로 리클라이너, 수납장, 난방텐트, (뜯어보지도 않은) 보드게임, 책상, 의자, 헬멧, 모기퇴치제 등을 순서대로 거래했다. 새 주인에게 갈 수 있도록 먼지에 둘러싸여 있던 친구들을 닦아내고 단장하고 보니 제법 새 제품처럼 보인다. 그동안 몇 번 쓰지도 않고 베란다 창고에 처박아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멀쩡했다.
올리고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모든 물건엔 주인이 있는 것인지 금방 모두 거래되었다.
여차저차 쓰지도 않고 모아둔 물건들을 처분하니 청소용품을 살 정도의 비용은 벌었더랬다.
게임을 시작해 볼까?
본격적인 정리 지옥이 시작된 건 안 쓰는 물건, 옷, 책들을 정리하면서부터였다. 과소비 습관을 지녔지만 기억 용량은 매우 적은 탓에 열어보기 전에 얼마나 많은 물건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책장, 서랍, 수납장 곳곳에 물건들이 꾸역꾸역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중 단연 옷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옷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한번 꽂히면 여러 벌 사는 못쓸 습관 때문이다.
"그래. 옷을 먼저 정리하자.."
살을 빼면 입겠다며 사들인 욕망의 작은 사이즈의 옷들, 잘 입지 않는 치마, 바지 그리고 유행 지난 니트 등등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다 꺼내고 보니 여긴 그냥 동묘 시장이다.
아름다운 가게에 방문 수거 신청하면 원하는 일자에 집 앞으로 오기 때문에 안 입는(상태가 괜찮은) 옷을 박스에 몽땅 집어넣었다. 어이쿠야 최소 70벌은 넘겠는데?!!
분명 큰 박스를 꺼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차고 넘쳐서 민망하다. 한 번도 입지 않는 옷들도 더러 있어 소비습관을 급 반성해 본다. 옷만 정리하고 버렸는데 반나절이 지나가버린 것이 맞는 걸까?
하나 반전은 아직 짐싸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쓰레기봉투 하나면 될 줄 알았다. 그것부터가 잘못된 발상이었다.
책장, 옷장, 수납함 곳곳엔 숨바꼭질하듯이 물건들이 숨겨져 있었다. 열 때마다 내 반응은 똑같다.
" 허.. 이건 또 언제 산거였더라.."
지난 추억들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물건을 샀던 기억조차 없는 것들이 한가득이다.
스쳐 지나가면서 산 것, 잘못 배송된 물건들, 한 번쓰고 처박아둔 물건 등등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스스로가 봐도 참 재미난 인간이다 싶다.
다음 집에서의 쓸모를 도저히 모르겠지만 난 또 그걸 쓰레기통이 아닌 이삿짐에 넣고 있다.
새집으로 가서 꾸역꾸역 채워놓을 생각 하니 아득하지만 버리자니 너무 아깝다. 어디서부터 잘못될 걸까?
분명 이삿짐을 최소화하자고 다짐했건만 어째서 내 손을 물건들을 쓸어 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운이 좋은 아이들
최종적으로 박스에 담긴 물건을 들여다보니, 몇 년째 나를 따라오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딱히 쓰지 않아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음에도 이번에도 내 상자에 간택당했다.
새집으로 가면 또 어디 깊숙한 곳에 처박힐 아이들이겠지만 이들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아마 어릴 때 삼 남매로 자란 탓에 생일 선물을 받으면 뺏길까 봐 동생들 몰래 물건을 서랍 깊숙하게 숨겨두는 버릇이 지금까지도 남은 듯하다.
더 좋은 주인이 혹은 쓰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또 내 박스에 들어가버린다.
채우기 전에
언젠가부터 물건을 구매할 때 물건의 쓸모보단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란 생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몹쓸 소비형태는 결국 쓰지도 않아도 쌓이는 쓰레기만 만들어내게 된다.
3초면 결제를 할 수 있는 세상에서 내 생각도 3초로 줄어든 것 같다. 용돈 1,000원을 갖고 문방구에서 신중하게 고르던 어린아이는 이젠 어디에도 찾을 수없게 되었다.
모든 게 쉽고 편해진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고 신중하던 그 아이를 다시 소환할 수 있는 날이 올려나.
무조건 빈 공간을 채우려 하기보단 생각을 먼저 해봐야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