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악연에 대해서
그에게서 부고 문자가 왔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즐거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그때 문자가 하나 왔다.
'000의 아버지께서 별세하셨기에.."
그걸 보는 순간, 맛있었던 케이크가 딱딱한 돌을 씹는 것처럼 느껴져 포크를 내려놨다.
표정이 굳어진 나를 보고 친구들은 물었다.
"누구한테 온 문자야? "
그건 6~7년 전 함께 일했었던 대표이자 한동안 미워했던 K에게서 온 부고 문자였다.
과거엔 그를 저주하기고, 그의 사업이 잘 안 되길 바랐건만 문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너무 쓰였다.
뭐랄까.. 그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좋은 인연들 덕분에 스스로를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워낙 무디고 사소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상처도 잘 받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내 기억 창고에 '미움'을 당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B와 K , 이 둘은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각각 내 상사로 만난 사람들이다.
먼저 B는 직장의 매운맛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신입 때 만난 부장이자, 소문난 예민보스였다.
출근 첫날 인상에 남는 장면이 40분 동안 사수를 쥐 잡듯이 잡는 B의 모습일 정도니, 말 다했지.
"네가 운이 좋아서 그래"
그녀의 눈엔 실수 투성이 막내인 내가 유난히 거슬렸을 것이다.
부장의 결재를 받으러 가는 시간만 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속이 안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손톱을 다듬다가도 결재를 받으러 갈 때면 빨간 팬을 들고 지적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적을 빙자한 막말 대잔치 시간이다.
"하.. 너 초등학교도 안 나왔니!!" "야~!!! 이거 안 봤어!!!! 장난쳐? 지금? 마침표 찍으라고!!! "
덕분에 나의 천사 같은 일잘러 사수는 부장에게 혼이 날까 봐 문서를 봐주고 또 봐주는 수고를 했었다.
그런 B가 가장 크게 비수를 꽂은 건 실수했을 때가 아닌, 처음으로 큰 액수의 사업을 따냈을 때였다.
신규 사업에 대한 욕심이 있던 총장은 서류를 열심히 쓰는 내게 기대를 걸고 있었고, 나 또한 한 건을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 며칠 밤을 새워 결국 사업자금을 딸 수 있었다.
다음날 회의에서 부장 B는 칭찬하는 직원들의 말을 제치고 딱 한 마디 했다.
"야 착각하지 마, 그건 네가 잘해서 그런 거 아니고 단지 운이 좋아서 그래."
그날 이후 차곡차곡 쌓여온 설움과 분노가 모여 마음속 깊숙한 미움의 창고로 가게 되었다.
"아 미안, 지금 바빠서... 나중에"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K는 작은 스타트업의 대표였고 행사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되었다.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으니 함께하자는 그의 제안에 이끌려 곧장 합류하게 되었다.
전 직장의 부장에게 몹시 시달린 탓에 자상해 보이는 K 대표가 처음엔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이번 상사와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으로 시작했다.
그를 깔끔하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늘 정신없는 사람>이다.
함께 사업 제안 발표(PT) 날이나 외부 미팅을 나가는 날엔 항상 지각하는 K 때문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고,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나 제출 문서를 하루 전에 통보하고 지시했다.(말투만은 부탁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그를 미워하게 된 건 따로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K와 동업자이면서 내 사수이기도 한 T에 대한 그의 신뢰와 애정은 남달랐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항상 내가 말한 의견을 흘려듣고 넘기기에, 어느 날은 T에게 가서 대표에게 내 의견을 대신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K가 내 말은 안 들어요. 중요한 건이니까 꼭 말해주세요."
3번을 넘게 '나중에 나중에'만 외치던 그가 T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환하게 웃으며
"와 좋다 그 의견, 역시 넌 천재야. 그거 당장 하자!! "라고 했다.
덕분에 의욕은 나날이 떨어져 갔고 마음속엔 미움과 시기질투로 가득 찬 채로 그곳을 나왔다.
그들에게 나는
사실 그들에 대한 미움을 친구들에게 원 없이 털어놓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지금은 미운 흔적만 남았다.
시원하게 욕과 저주를 퍼부었기에 미워할 만큼 미워한 것이다.
스타트업을 나오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K 대표를 외부행에서 마주친 적이있다.
그 때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가벼운 안부를 나눴었다.
마침 예전에 K도 함께 알고 지냈던 타 회사 대표도 있었는데 나를 보자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엇 이제 둘이 좀 풀었나 보네요? 다행이다."
K와 친했던 그분도 우리 둘 사이의 있었던 어떤 문제(?)를 알고 있던걸까?
아마 대표도 내가 나간 후 여기저기 내 이야기를 했겠지 싶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도 나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 때 저주했던 마음의 죄책감을 덜었다.쌍방이다.
그에게 부조금을 보내기로 했다.
미운 마음은 다른 좋았던 기억도 모두 덮어버릴 정도로 힘이 강하다.
그래서 기억이 다 날아가버려도 미웠다는 감정의 흔적은 간직한 채로 살아간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은 분명 잘못된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정의하는 모든 건 아니다.
K의 부고 문자를 받고 하루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미움에 가려져서 잊고 지냈던 그와의 함께 웃던 순간이 떠올랐다.
남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걸 좋아해 피자를 만들어주던 모습, 언젠가 함께한 술자리에서 아버지를 존경한다던 그
후.. 부조금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미워했던 감정도, 지금 K가 안쓰러운 감정도 그럴 수 있지.
그냥 부조금을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