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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립의 순간들①: 이별 이후 나를 세운 것

서른 즈음, 나는 이별과 함께 내 인생의 기준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by 테일러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 나는 공자의 ‘이립(而立)’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서른 즈음이면 스스로 삶의 기준을 세우고, 세상 속에서 한 사람으로 ‘서야 한다’는 말.
그땐 그 말이 막연하게만 들렸다.
‘나는 과연 내 인생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모르겠는 나날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립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관계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있을 때,
그리고 그 관계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나는 내 안에 조용히 자라고 있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달리는 것보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좋아.’
‘나는 고기보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잘 맞아.’
‘나는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에게 종속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나는 조금씩, 아주 사적인 방식으로
나만의 기준을 갖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그것이 내가 이립을 시작한 순간들이었다.



[맞추는 게 사랑이라 믿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조금씩 미뤘다.
헬스장 등록을 하고 싶다는 말 대신, “같이 밖에 나가서 뛰자”는 제안을 따랐고,
삼겹살과 치킨, 피자와 돈가스를 먹으며 주말을 보냈다.
사실 나는 기름진 음식이 잘 맞지 않았다.
먹고 나면 늘 속이 불편했고, 소화가 덜 되는 느낌이 남았다.
그런데도 ‘데이트란 원래 이런 거겠지’ 싶어 조용히 참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자주 자기 자신을 설득하게 만든다.
그때의 나는 ‘맞추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관계 안에서 나는 점점 흐릿해졌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안쪽은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다.
내 몸이, 내 시간들이, 내 감정들이 조금씩 닳아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헤어진 후의 고요함 속에서 되찾는 것]


이별 이후, 나는 낯선 자유를 마주했다.
처음엔 허전했고, 낯설었고, 마치 큰소리로 울려 퍼지던 음악이 멈춘 뒤의 정적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요 속에서 조금씩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이제는, 네가 진짜 좋아하는 걸 해도 돼."


그렇게 시작된 게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고, 거울 앞의 내 모습이 어색했지만
묵직한 무게를 들고 나면
이상할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다.
나한테 이런 힘이 있었나 싶을 만큼,
땀 흘리는 시간이 점점 좋아졌다.


식단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억지로 뭘 참지 않아도,
내 몸에 맞는 재료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고르고, 씻고, 정리하는 시간이
어느새 소중한 루틴이 되었다.


체중이 줄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내 몸이 가볍고 맑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늘 반복되던 소화불량과 트러블이 줄어들고,
밤에 잠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몸이 좋아지니까 마음도 따라 움직였다.
매일 조금씩, 나는 다시 ‘나’를 세워나가고 있었다.


[왜? 라는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와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쯤,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처음에는 폐백을 맞춰줄까 생각했다. 제사도, 가족 모임도, "한두 번쯤은 감수할 수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게 단지 몇 번의 예식이나 방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멈췄다.


“결혼식장은 상견례 전에 잡는 게 예의가 아니다.”

“제사는 가족의 의무다.”
“폐백은 여자의 도리다.”
그런 말들이 당연하다는 듯 들려올 때,
나는 내가 숨을 참고 있다는 걸 느꼈다.


왜 ‘전통’이라는 말은 언제나 여성에게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할까.

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여자 쪽의 시간과 감정과 몸을
더 많이 내놓아야만 ‘괜찮은 며느리’가 되는 걸까.
그 질문들이 하나둘 마음속에 떠올랐고,
답은 점점 분명해졌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해
더 이상 맞추지 않기로 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의무와 불균형한 관계 속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소중했고,
이제야 겨우 나를 세워가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어디에 서 있고 싶은지 안다]

나는 아직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때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작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싶은지는 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얻은 내 몸의 힘,
좋은 재료로 나를 아끼며 살아가는 일상,
관계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수하지 않기로 한 결심.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나는 조금 늦게 이립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나만의 속도로,
내 삶에 기준을 세우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립은,
거창한 인생철학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믿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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