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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참 너 왼손잡이였지?
그렇게 말하며 J는 미세하게 내 왼쪽으로 수저를 놓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년 만에 본 J였다. 그것도 단 둘이가 아니라 공통의 친한 친구를 끼고 만난 자리였다. 우린 겹치는 친구가 없는 이상 따로 연락할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내가 왼손을 쓰는진 어떻게 알았담. 기억은 또 어떻게? 기억을 한다 쳐도 수저를 왼쪽에 놓아주다니. 우리 가족에게도, 커피에 늘 빨대를 꽂아 건네던 애인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생각지도 못한 배려.
오른쪽에 놓인 수저를 왼쪽으로 옮기는 일은 귀찮거나 번거롭다고 언급하기 뭣 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다. 별 게 아닌 만큼이나 J의 배려는 별 것이 되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왜 학창시절 J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지 그때 알 것 같았다.
J는 고등학교 2학년 땐가 전학을 왔다. 그는 금세 같은 반 아이들과 어울렸고 반장을 맡았다. 반 친구들을 잘 챙겼으며, 착하고 똑똑한 데다 어른스러웠다. 그랬던 J와 같은 이름이었던 난 J의 이름을 부르는 게 영 어색했다. 부르지 않는 만큼 친해질 접점이 적었을 테다. 하여 이제는 J의 이름을 불렀던 순간보다 J가 놓아준 수저를 머릿 속에 떠올리는 식으로 그를 소환한 적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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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 아니면 직장인?
피부를 치료하러 간 곳에서 누워서 퍼진 광댓살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학생은 확실히 아니고, 내가 만든 직장에서 일하는 거니까 직장인. 직장인이에요. 이번에도 난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대답을 고른다.
미필적 거짓말에 핑계를 대자면, 물어본 사람도 진지하게 궁금해서 묻진 않았으리라. 게다가 보편적인 질문에 지나친 정직함을 내세웠다간 스몰토킹을 넘어 공개하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꺼내었다는 걸 떠올렸다. 학습의 동물이니까.
인스타를 내리다 본 장면이 이런 경험과 오버랩된다. 방송 진행자와 시민 두 명의 인터뷰 장면이다. 한창 대화를 이어가던 중년 여성 한 명이 대뜸 말했다. 언니, 우리 이제 그냥 밝히자…….
마치 기혼자처럼, 자녀가 있다는 듯이 인터뷰를 했던 두 여성은 알고 보니 미혼에다 자녀도 없었다. 당연히 결혼을 했을 거라고, 자녀를 위한 음식을 준비 중이라고 생각한 진행자의 질문을 그들은 정정하지 않았다. 중년의 그들이 미혼이란 사실이 밝혀지자 진행자는 살짝 당황했지만 유쾌한 상황이었고, 짜인 대본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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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으레 '다수'에 속할 것으로 짐작하는 이 장면이 익숙하다. 고쳐야겠지만 나 역시 몇 가지 학습된 힌트만으로 타인의 속성을 쉽게 분류한다. 이를테면 어린이는 자녀로, 중년은 부모로, 청소년은 수험생으로,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카테고리에 쉽게 넣어버린다.
쉽다. 다수로의 짐작은 확률상 효과적이고 간편하다. 하지만 간편한 방법인 만큼 간편하게 기타의 존재를 지우는 것도 같다. 기타들의 답변에는 대게 부연설명이 필요하고, 부연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면 그들은 차라리 지워지는 쪽을 택한다.
- 우리나라엔 장애인 주차석이 너무 많아, 꽉 차있는 걸 못 봤어.
다수만을 전제하는 악의 없음은 생각이상 커다랗게 작용한다. 낯선 이들의 스몰토킹처럼, 악의 없음 앞에서 기타 등등 아름없음은 차라리 집에 머무르는 쪽을 택했고 그런 식으로 시선에서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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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다수와 기타, 모든 경우를 고려하자고?
스스로의 질문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나 역시 수저통에 가까이 있을 뿐이니까, 때론 막내라는 이유로 몸을 들썩거리며 수저를 얼른 놓아버리는 사람이라서다. 겉으로는 상대를 위해 놓는 수저이지만, 내 의중에 상대는 없다.
그래서 이런 생각 끝엔 나 대신 대답해 주길 바라기라도 하는지 늘 J를 불러내고야 만다.
수저를 놓는다, 놓아준다의 의미를 알았던 J를,
왼손잡이를 위해 구태여 수저의 위치를 정정했던 J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