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글이 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내겐 그렇다. 죽음을 얘기하려 할 때마다 누군가 죽었다. 최근의 기억만 해도 몇 번이던가. 형제의 나라에서 천재지변으로 수만 명이 건물에 깔렸고, 우리 지역 지하 주차장에선 시민들이 홍수에 잠겼다. 축제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숨을 멈추는가 하면, 교실에서 누군가의 스승이자 자식이 목숨을 끊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 사고가 아니더라도 슬픔이 군중의 밑으로 가다듬어질 쯤엔 주변에서 죽음의 소식이 들렸다. 요즘 탄생이 귀하다지만 5쌍둥이나 태어나야 기사거리이지, 우리는 늘 죽음을 듣고 살아간다.
그래서 산 자로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얘기를 할 수도 없다. 사랑 같은 주제는 개개인의 가치관이 달라도 존중이 가능하다. 그러나 죽음처럼 누군가의 아픔을 불러낼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보는 이 몇 없는 글이더라도 얘기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나는 죽음에의 관찰자로서 있을 뿐이다. 나는 장의사도, 부검의도, 의료계 종사자나 교황, 수녀 무엇도 아니지 않나. 언젠간(내일일 수도 있고) 직접 죽음을 겪겠지만은 그땐 너무 관련이 깊은 나머지 목소리가 가닿지 않겠지.
몇 해 전 이모를 떠나보낸 후로 그렇다. 슬퍼하던 가족들, 누구도 나에게 위로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나는 관찰자다. 위로를 받고 싶어 부리는 어리광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실. 이모는 첫 조카인 내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다. 지금도 나는 기억 속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의 슬픔 나의 상실은, 엄마를 잃은 사촌 동생과 동생을 잃은 나의 엄마에 비할 바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어디에서도 죽음을 거론할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느껴왔다. 다행히 자격과 별개로 미래에 있을 주변 이들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선 속에서 나름의 정리를 내렸다. 심플하다. 이 생각은 나라는 인간을 커다랗게 이루고 있다. 죽음의 생각을 기록하기란 여전히 어려워서 이렇게나마 쓰기를 조금씩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