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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Jul 09. 2020

‘Black’ Lives Matter의 이유 <3>

흑인 사회운동가 오드리 로드와 제자백가 철학자 장자를 중심으로

*대학에서 들은 "동양으로 서양읽기" 과목의 기말 레포트입니다. 서양 사상 또는 서구적 현상을 장자적 관점에서 독해하는 일이 목적이라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접근입니다. 당연하게도 이 글이 장자 사상 전체를 다루지는 못했다는 점도 미리 밝혀둡니다. 경어로 작성되었습니다.


자유


장자는 세계에 관해서, 삶에 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가 곧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모든 이야기가 곧 하나로 통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까지의 논의와 관련해서 장자적 ‘자유’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BLM 운동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기저에는, 자유라는 개념을 놓고 벌어지는 힘겨루기가 깔려 있습니다. 백인의 기득권에 대항하여 흑인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BLM 운동이 백인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흑인보다도 열등한 지위에 서 있는 동양인을 배제하는 BLM 운동은 흑인의 자유를 선언할 자격이 없는가? 흑인과 백인의 자유, 흑인과 황인의 자유는 서로 충돌하는가?


근본적으로 자유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옵니다. 그 답 가운데 절대적 정의란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에서 채택하는 답은 사회 속의 명백한 권력관계를 반영합니다.


BLM 운동에 대해 White Lives를 내세우는 답에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려온 당연한 권력이 흑인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멈추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Yellow Lives를 지적하는 답에는, 자신의 억압받는 지위를 인식함에도 서양인의 관점에 편승하는 우월감을 놓기는 싫은 불편한 딜레마가 녹아 있습니다. 그 딜레마로 Yellow의 분노는 굴절되어 Black을 향합니다.


로드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BLM 운동은 백인의 두려움은 무시하고 전진하며, 딜레마에 처한 동양인과는 화해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역시 흑인 사회운동가로서 로드가 제창한 하나의 자유입니다. 자유를 논의하는 이유도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도구, 우리의 자유를 만들기 위해 장자의 자유를 논의해보겠습니다.


<소요유>, 차이로부터의 자유


《장자 내편》의 첫 번째 이야기는 <소요유(逍遙遊)>입니다. 나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면(逍) 다른 한편 나는 우주론적 존재가 되고(遙), 그 상태가 곧 진정으로 자유로운 유유자적의 경지(遊)라는 의미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장자는 ‘나’의 존재에 집착하는 사유를 버릴 때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다양한 일화들이 나와 있지만, 장자와 혜자의 대화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혜자는 왕으로부터 거대한 박씨를 얻었습니다. 박씨를 심어 거대한 박이 났는데, 박은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고, 둘로 쪼개 표주박을 만들었더니 평평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혜자는 이 쓸모없는 박을 부숴버렸습니다.


장자는 혜자에게 “참으로 큰 것을 쓰는 데 졸렬하다”고 비판합니다.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는 약으로 솜을 빠는 일을 하던 가문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는 손에 트지 않는 약을 만드는 기술을 샀고, 이를 이용해 월나라와의 수중전을 승리로 이끈 장수가 되었습니다.


세상 그 무엇이든 쓰기 나름이고, 혜자는 자신에게 유용하게 쓰려고만 고심하다 보니 사물의 본질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장자는 혜자가 부숴버린 박을 커다란 배(船)로 썼으면 어떠했을까 물어봅니다.


둘의 대화는 사물의 본질과 쓸모에 대한 가르침인 동시에, 자유로운 사유에 관한 통찰이기도 합니다. 혜자는 사물을 판단할 때 자신의 존재를 개입시켰고, 그 결과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일은 위험합니다. 바라보는 주체가 바라보아지는 대상에게 행사하는 인식론적 폭력입니다. 그렇기에 아상(我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분별심이 생기고 도(道)에서 멀어진다고 장자는 지적합니다.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려면 나의 존재를 지워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존재는 세계 전체와 하나가 되고 도와 통합니다. 장자적 자유는 이처럼 나의 존재를 잊고 모든 존재와 평등한 위치에 설 때 가능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차이에 관한 은유로도 받아들입니다. 차이란 필연적으로 ‘나’를 전제합니다. 나의 존재가 서 있을 때 나와 다른 사물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내가 정해져 있지 않다면 차이도 없겠습니다.


BLM 운동의 반대 논거로 나타나는 WLM과 YLM의 목소리는 흑인과 백인의 차이, 흑인과 황인의 차이를 전제합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흑인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 되고, 황인을 외면한 이기적 움직임이 됩니다.


로드의 주장처럼 차이를 힘으로 삼고 BLM 운동을 장자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면, Black Lives Matter을 “흑인의 인권‘이’ 소중하다.”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흑인의 인권만 소중하다는 해석도, 흑인의 인권도 소중하다는 해석도 인종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흑인의 인권이 소중하다고 주장할 때, Black의 자리에는 White도 Yellow도 다른 어떤 색깔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대상과는 분리된 주체로서의 ‘나’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않은 한, 우리 중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로드의 외침은 이렇게 장자적 맥락으로 재해석됩니다. 장자에게 자유는 나를 전제하지 않고, 그렇기에 차이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Black의 자유는 정확히 White의 자유이며 Yellow의 자유입니다. 장자적 관점에서는 백인 기득권조차 흑인 인권 신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Black Lives Matter를 반대하는 All lives Matter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때 같음을 폭력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다는 명분으로 서로 다른 경험을 묵살하고 독단적인 ‘대의’를 내세워서는 곤란합니다. 이런 오류는 자유나 정의를 하나로 개념화하려는 시도로 인해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분별이자 폭력이며, 도는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도 오류입니다.


<제물론>, 차이와 함께하는 자유


도의 정의할 수 없는 속성은 <제물론(齊物論)>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제물론의 뜻은 사물을 평등하게 하는 논의, 내지는 사물에 관한 논의를 평등하게 하는 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해석을 통합하면 제물론은 사물과 그에 대한 이해를 평등하게 만드는 이론입니다.


사물과 우리의 인식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장자는 우리가 가진 고정된 앎을 해체합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이 참된 앎일까요? 사실은 모르는 건 아닐지요. 우리가 말(馬)이라 부르는 것은 참으로 말일까요? 말을 가리켜 손가락으로 부르든 나뭇잎으로 부르든 괜찮다면, 말을 말이라 부르는 것은 오류가 아닌지요. 이처럼 <제물론>에서 장자는 우리가 내면화한 모든 당연한 인식에 질문을 던집니다.


장자는 평등한 존재와 인식은 고정된 앎을 파괴함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큰 도는 일컬어지지 아니하고, 큰 말은 말하지 아니하며, 크게 어진 행위는 어질지 아니하며, 크게 깨끗한 행위는 겸손한 체 아니하며, 큰 용맹은 사납게 굴지 않는다.” 일컬어지는 도는 도가 아닙니다. 말해지는 말은 말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같음이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같음의 도를 정의하려 들지 않는다면 폭력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지만, 정의하여 말할 수는 없는 방식으로 같은 것이지요. 다름을 존중하는 같음, 다름 속의 같음은 이렇게 가능합니다.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와 그에 뒤따르는 자유는 이렇게 가능합니다.


다시 WLM과 YLM을 떠올려보면, 이들의 주장은 ‘나’의 존재에 입각해 차이를 분별할 뿐 아니라 단일한 자유를 상정하기도 합니다. 흑인의 자유로 인한 백인의 부자유를 두려워하고, 흑인의 자유와 분리된 백인의 자유를 상정했기 때문입니다. 오드리 로드도 이에 관해 지적한 바 있습니다. “... 서로 힘을 합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싸움을 하는 대신, 파이 하나를 두고 더 큰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끼리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정해진 양의 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 조각을 향한 분열이 발생하고 더 많은 자유를 향해 싸울 수 없게 된다고 로드는 지적했습니다. 모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도,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를 구분짓는 분별심과 뒤따르는 이기심은 자유를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Yellow Lives와 Black Lives가 상충하고 각자의 자유를 놓고 다툽니다. ALM이 BLM과 YLM을 동시에 가로막습니다.


자유의 주객이원론을 멈추고 장자적 자유를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평등한 존재와 인식을 위해서 장자는 앎을 버렸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도 단일한 자유를 폐기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지 생각해봅니다.


<인간세>, 무위의 정치


 장자가 단지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영역에서만 자유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자는 <인간세(人間世)>나 <응제왕(應帝王)> 등에서 자신의 인식론과 존재론에 입각한 정치학을 개진합니다. 지면상 <인간세>를 주목해서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인간세>는 난세 속에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난세를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장자가 제시하는 방안은 ‘무위정치’입니다. 도가(道家) 정치학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인간세> 도입부에서는 제자인 안회가 스승인 공자에게 이별 안부를 전하려 합니다. 안회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떠나려 합니다. 공자는 그런 안회에게, 어지러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지 묻습니다. 안회는 여러 가지 답을 내놓지만 번번이 공자의 반론에 꺾입니다. 결국 안회는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인정하고 공자에게 정치의 방도를 묻습니다.


공자는 다만 재계하라 합니다. 안회는 자신을 비우고 공자에게 다시 정치의 방도를 묻습니다. 공자는 “마음에 문과 담장을 치지 말고 도를 거처 삼아 부득이할 때에만 말하라”고 지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안회가 처음에 내놓은 갖은 방도는 무언가를 행하려는 위의 정치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위의 정치는 위정자가 신봉하는 독단적 정의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흔드는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안회가 위의 정치를 포기하기까지 끊임없이 반론합니다. 안회가 결국 위의 정치를 포기하자 공자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분별심을 버리며 부득이에 의해 행위하라고 조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정치입니다. 위정자는 자신의 선호나 정의는 비워내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어떤 분별적 가치에도 휘둘리지 않는 튼튼한 심지를 기르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물의 존재와 하나되는 능동성을 획득합니다. 위정자는 행하지 않지만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장자적 정치 이론의 정수라 하겠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살펴본 장자적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나의 존재를 비우고 분별심을 버리는 것은 <소요유>의 가르침, 틀을 정해두지 않고 부득이에 의해 행하는 것은 <제물론>의 가르침의 확장입니다.


그런데 무위정치라는 개념에 비추어 보면, BLM 운동을 둘러싼 너무나 많은 위의 정치가 보입니다. BLM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폭도(RIOT)라 규정하는 정권과*, 같은 방식의 프레임을 짜는 언론은 흑인을 상대로 반쪽짜리 정의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백인 공권력이 비무장 흑인을 살해한 사건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현재 미 정권이 대표하고 있는 국민은 백인 보수주의자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동양인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흑인의 인권 신장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동양인과 흑인이 ‘파이의 자유’를 놓고 경쟁하는 것도,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정치는 우리 자신을 억압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Black Lives가 중요하고 그렇기에 Yellow Lives가 중요한 국가입니다.

자유를 폭력적으로 정의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모두가 더 많은 자유를 꿈꾸는 세계입니다.

그 시작은 각자의 자유를 가로막는 All Lives Matter가 아니라 ‘Black’ Lives Matter일 수밖에 없습니다.




*류지복, “트럼프 “폭동과 약탈 저지 위해 군대 동원 ”초강경 대응“, 연합뉴스, 2020.06.0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47474.html

안병주, 전호근, 《역주 장자1》, 전통문화연구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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