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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Nov 03. 2020

그 끝이 상처뿐일지라도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1. 단 하루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날이 단 하루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나보다 쿨한 사람들은 상처받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상처를 입더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런 축에 속하지 못한다. 나는 상처를 잊기는커녕 수 차례 곱씹는 뒤끝쟁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하다.


나처럼 상처를 일일이 세어가며 아파하는 사람도 있지만, tv를 보면 세상에는 스스로의 상처를 억누르거나 외면해서 아파하는 사람도 많아 보인다. 앞에서 말한 ‘쿨한 사람들’도 사실 자신의 상처에 둔감하거나 둔감해졌을 뿐, 나보다 훨씬 더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인간관계에서 상처가 얼마나 필연적인 것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인간관계를 가꾸고 돌보면서도 상처를 입지만, 인간관계로부터 도망쳐서 갖는 혼자만의 시간에도 다른 결의 상처를 얻곤 한다.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큰 상처를 겪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는 (애인이든 친구든 일반적인 애정의 의미에서) 미움보다도 많은 상처가 뒤따르기도 한다.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는 단 하루를 위해서, ‘내게 무해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내게 퍽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현실에서 무해한 인간관계를 찾기 어렵다면, 혹시나 이 소설이 그 상상을 충족시켜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2. 내게 무해한 사람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문구에서 출발했으니, 소설집 한가운데 있는 「고백」이라는 단편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면 좋겠다. 소설은 ‘미주’가 ‘종은’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액자식 구조를 취한다.


내부 이야기는 ‘미주’, ‘주나’, ‘진희’, 세 사람의 고등학교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거칠고 직설적인 성격의 주나, 여리고 세심한 진희, 그리고 그 사이에 화자인 미주가 있다.


셋은 베프였다. 방과후에 늘 함께 어울리고, 문이과반으로 갈라진 이후에도 ‘그냥 친구는 아닌’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미주는 특히 진희를 좋아했다. 진희의 세심한 눈길과 함께하면, 같은 소설에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진희는 미주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 않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하지만 셋의 관계에는 어떤 종류의 파국이 예비되어 있다. 서로 다른 온도와 속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그러한 씨앗이 심어져 있다. 미주가 주나로부터 느낀 일말의 악의는, 아픈 결말을 향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진희의 열여덟 번째 생일, 진희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한다. 주나는 진희가 역겹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고, 미주는 진희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 진희는 자신의 삶을 놓아버린다. 유서도 남기지 않고.


미주는 자신이 진희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유서도 남기지 않는 진희의 선택이 자신에게 남긴 ‘공백’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미주와 주나의 관계는 자연스레 끊어지고, 대학 진학 이후 피상적으로만 회복된다. 그러던 중 둘은 우연히 놀이터에서 마주친다. 미주가 주나를 피했다고 쏘아붙이는 주나에게, 미주는 진희에게 심한 말을 했던 주나의 과거를 꼬집는다. 주나는 대꾸한다.


“어. 알아. 너 나 탓했지. 나 땜에 걔 죽은 거라고. 응? 그럼 차라리 시원하게 얘길 하지 그렇게 쳐다보니? 네 눈... 네 눈빛에 내 기분이 얼마나 개같았는지 알아?”
“네가 그때 걜 어떤 표정으로 봤는지 알아? 걔가 사람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경멸하듯 봤어, 넌.”
“우습다. 가장 잔인한 사람은 너 아니었니.”


주나의 말은 가혹하더라도 진실이다. 미주는 주나의 비난을 부정하지 못한다. 미주의 눈빛은 분명 “주나가 진희에게 했던 말보다 더 잔혹한 말”을 건넸다.


여기서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역전된다. 미주가 외면해온 반대편의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선 진희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게 무해한 결론일 뿐이었다. 진희의 마음속에 있는 수많은 상처와 흉터를 외면했기에 가능한, 편리한 결론이었다.


한편 조금은 거칠고 직설적인 주나로부터 미주는 일말의 악의를 감지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 벌어지는 둘의 말다툼은 이 불편한 감각을 뒤집어놓는다. 주나는 미주로부터 진희를 향해 발산된 커다란 악의를 폭로한다. 한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은 파괴적인 악의. 내가 파괴당한 것보다 더 많이,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파괴를 저질렀다는 사실(혹은 가능성)은 얼마나 마주보기 어려운가.


이제 미주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게 된다. 미주는 자신이 그때 진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믿었지만, 사실 주나보다도 잔혹한 말을 눈빛으로 건넸다. 자신이 진희에게 버림받았다며 현실로부터 도피했지만, 사실 버림받은 쪽도 상처받은 쪽도 진희였다. 미주는 외면했을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해로운 사람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미주는 비로소 온전한 가해자의 위치에 선다. 비록 감당하기 어렵더라도.


누군가를 무해한 사람이라 호명하는 순간에조차, 타인에 대한 이기적 인식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퀴어에 입각한 인식의 권력을 읽어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무해한 사람 같은 건 없다고,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는 없는 존재라고 인정해야 하는 걸까.


후자에 주목해본다면,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 결국에는 상처만 남게 될 비극임을 인정하고, 관계가 주는 일시적 행복에 취해야 하는 걸까.


3. 관계, 결말, 고통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관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관계든지, 관계의 쓸쓸한 결말을 암시하는 단서가 늘 함께 심어져 있다.


‘이경’과 ‘수이’의 연애를 다룬 「그 여름」에서는, 서로 다른 둘의 성장 환경과 캐릭터가 둘의 관계가 흔들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고등학생 때는 퀴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소수자로서 끈끈하고도 순수한 사랑을 나누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 이경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존중하는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기숙사에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카페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읽고 채팅을 하면서 이경은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서로 나이도 다르고 하는 일도 가지각색인 사람들과 바에 모여 같이 술을 마시고 떠들어대면서 이경은 수이와 함께할 때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을 맛봤다.”


이경이 ‘은지’라는 새로운 인물을 사랑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종료되지만, 사실 이경이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수이를 판단”했음을 깨달을 때부터 이런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이경이 수이에게 느꼈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중략)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이경은 수이 탓을 했다. 수이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이 가진 아름다움을 망각하지 않는 것, 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니까. 이때부터 이경은 더 이상 수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601, 602」에는 이웃인 ‘주영’과 ‘효진’의 친구관계가 맺고 끊어진 과정이 실려 있다. 그 과정에는 눈으로 보이게 구조적인 힘이 작동한다. 공부를 잘하는 효진을 “돈이나 벌고 시집가면 그만”인 아이로 보는 엄마, 그리고 밖에서는 엄친아지만 집안에서는 효진에게 온갖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가 있다. 그 모든 것을 방치하고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아빠가 있다.


주영은 오빠에게 너무 심하게 맞는 효진을 보며, 오빠의 장난감 로봇을 부수며 그만두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영은 남의 집안일에 간섭하는, 드센 ‘여자애’가 될 뿐이다. 주영의 생각과 마음을 존중해주지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집안의 압력에 시달리는 주영의 집도 결국에는 효진이네와 큰 차이가 없다. 감히 오빠가 아끼는 장난감을 부순 여자애는 이제 친구로 남을 수 없다.


「모래로 지은 집」은 ‘모래’, ‘공무’, ‘나비’ 세 사람의 관계를 다룬다. 이 이름들은 고등학교 동호회 사이트에서 사용한 필명으로, 대학에 입학한 후 동호회가 폐지되기 직전에 세 사람은 처음으로 안면을 튼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인연을 능동적인 의지로 이어낸 것이기에 세 사람의 관계는 더욱 특별하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잘한 글들을 공유하며 놀던 연약하고 여린 인간들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된다. 나비는 공무의 글에서 받은 깊은 인상을 기억하고, 모래의 넉넉함과 천진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공무의 날카로운 글은 나비의 마음속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모래의 넉넉함을 만든 여유로운 가정환경은 나비의 냉소를 유발한다. 무엇보다 나비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이 관계의 앞날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너희랑 있으면 편해. 사람들이랑 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편할 수 있지? 그런 생각도 들고. 이게 얼마나 갈까.”
“넌 꼭 오래 살아본 사람처럼 말한다. 얼마나 갈지가 그렇게 중요해?”
(중략)
“응. 나는 그래”
나도 최대한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미래가 환상일 뿐이라는 걸 알아.


공무와 모래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결국에는 언제인가 다가올 차가운 결말을 직시하고야 마는 나비는, 어쩌면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나비의 비관은 현실로 다가온다.


군인 아버지를 둔 가정에서 학대당하며 살아온 공무, 폭력적인 남자친구와 교제하는 모래를 보면서 나비는 아프고 답답한 심정을 느낀다. 그런 마음이 점점 고조되는 이유는 공무와 모래가 “항상 받아들이는 쪽”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비는 공무와 모래에 공감했기 때문에 아파하고, 셋의 닮음을 견딜 수 없다.


공무가 심리학도에서 열차 기관사로 진로를 바꾸면서, 모래가 엘에이로 돌아가면서, 셋은 뿔뿔이 흩어진다. 관계의 끝은 처음 셋이 만나고, 나비가 쓸쓸한 이별을 직감한 시점부터 예고된 결말이다.


4. 넌 네 삶을 살거야.


관계에 끝이 정해져 있다는 슬픈 진실이 서사를 관통하고 있지만, 최은영은 거기서 좌절하지 않는다. 그 끝의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아치디에서」를 보자. 「아치디에서」는 여자친구 일레인을 붙잡으려 아일랜드까지 찾아온 포르투갈인 ‘랄도’와, 간호사 일에 시달리다가 감정을 잃어버린 스스로에 환멸을 느껴 아일랜드까지 도망쳐온 한국인 ‘하민’의 이야기다.


랄도는 엄마와의 갈등으로 용돈은 끊겼는데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길은 화산폭발로 막혀버렸다. 일레인에게는 차여서 묵을 곳도 마땅찮다. 랄도는 돈을 벌기 위해 시골 마을인 ‘아치디’에 정착하고, 하민을 만난다.


아치디라는 공간이 랄도와 하민의 최종 정착지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도피처라는 점에서, 이 관계의 결말도 추측해봄 직하다.


랄도는 직업도 없이 마약에 빠져서 가족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다. 하민은 여성이라는 지위로 인해 고된 노동을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해 상처를 입었다. 가족과의 관계와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는 시점에서, 두 인물은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결말은 비슷하게 나오지만, 그 과정에서 있던 일들은 ‘현실로 돌아간다’는 결말의 명도와 채도를 사뭇 다르게 만든다. 이제 ‘그 과정에서 있던 일들’을 살펴볼 차례다.


두 인물이 자신의 상처를 회복해가는 과정은, ‘네 삶을 살지 못했던’ 현실에서 도망쳐온 이들이 ‘네 삶을 살 거야’라고 서로를 응원하며 배웅하는 극적인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랄도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의 여린 감정을 외면하며 살아왔다. 예쁜 말과 꽃을 건네면 아버지는 도리어 화를 냈고, 힘든 일에 눈물을 보일 때면 아버지는 랄도의 나약함을 비난했다. 랄도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는 ‘남자’로 성장했다.


아버지는 남자가 우는 걸 거의 죄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슬픈 감정이 들면 늘 무서웠어. 눈물을 흘리면 벌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목이 메고 혀뿌리가 아파도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렇게 살다보니 슬플 때면 오히려 웃게 되더라.


하민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항상 남에게 양보했으며, 부지런하게 악착같이 달렸다. 그렇게 번 돈은 오빠의 결혼을 뒷바라지하는 데 쓰였다. 가정을 책임을 질 능력도 의지도 없는 오빠를 위해. ‘착하니까’라는 말로 가정을 위한 희생을 강요받고, 좋아하던 선배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등의 시련에도, 하민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꾹꾹 억누른다.


그러나 정작 하민의 삶에 하민의 자리는 없었다. 감정을 억누른 채 모든 부담을 떠안고 살아온 결과로 하민이 얻은 것은, 자아도 감정도 잃어버린 초라한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날, 다섯 살 어린 동생 하은은 하민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언니는 뭐가 좋아? 뭘 할 때 즐거워? 야간 근무할 때 기분이 어때?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뭐야?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어?
간단한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하민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잘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이런 말만 반복하는 자신을. 무슨 기분이냐고? 그게 뭐가 중요하지. 그렇게 대답하고는 사실 자신이 자기 감정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은에게서 문자가 왔다.
-착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랄도와 하민은 각자의 상처를 공유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이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는 아물어간다. 인간의 유약한 마음이 어찌저찌 버티며 살아가는 것은, 같은 상처를 지닌 타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근사한 사실 덕분이 아닐까.


랄도와 하민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서로 다른 성별로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만큼 둘에게서 서로 통했던 점은, 나약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폭력적인 세계가 쥐어준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지쳐 쓰러진 마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양과 깊이를 막론한, 상처 그 자체였다. 상처를 지니고 있었기에 랄도와 하민은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말했듯이 이 관계도 결국 아린 과거의 기억으로, 또 다른 모양의 상처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 랄도는 마요르카에 있는 이모의 식당에서 일하러 떠나고, 하민은 대학원에 입학할 채비를 한다. “넌 네 삶을 살 거야”라는 하민의 슬픈 인사처럼, 둘은 각각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가슴 아픈 과거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랄도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민을 생각한다. 그리고 하민의 마지막 한 마디를 떠올린다.


넌 네 삶을 살거야.


5. 끝의 이후에 있는 것


랄도의 회상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하민과 랄도의 관계가 영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만남이 마냥 행복했기 때문도 아니다. 하민과 랄도의 이별은 삶의 진실을 반영할 뿐이다. 인간이 유한하듯 관계도 유한하고, 마음속 곳곳에 흠집을 남긴다.


그럼에도 우리가 상처와 아픔을 견디며 계속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그 유한함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내가 다른 유한한 존재에게 품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다른 유한한 존재에게 기댈 수도 있다는 것. 오로지 인간이, 관계가, 사랑이 유한하다는 이유만으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하민과 랄도는 아치디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보았고, 종국에는 또 한 번 새로운 상처를 얻었다. 하지만 아픔이 아픔을 감싸는 기적을 알고 있기에, 둘의 이별은 차갑지 않다. 몇 번이고 일어날 기적을 믿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백」에서 미주는 진희를 궁지로 몰아넣은 자신의 죄스런 과거를 종은에게 털어놓았다. 미주의 마음은 관계로 인해 헤졌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또 하나의 관계를 소망한다. 종은은 생각한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인간은 항상 사랑의 끝에 남겨진 차디찬 유한함에 상처입지만, 그 끝의 이후에 도래할 따뜻한 유한함을 기다린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아니, 우리 마음의 형태다.


살펴본 소설들은 제각각 쌉싸름한 뒷맛을 남겼지만, 소설집을 닫고 나면 그 뒷맛을 다시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따뜻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만은 않은 이별의 감각과, 그 끝의 이후에 언제인가는 발견할 한 움큼의 희망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그곳에는 ‘김이경’, 그렇게 자신을 부르고 어색하게 서 있던 수이가, 강물을 바라보며 감탄한 듯, 두려운 듯 ‘이상해’라고 말하던 수이가, 그런 수이를 골똘히 바라보던 어린 자신이 있었다. 이경은 입을 벌려 작은 목소리로 수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강물은 소리 없이 천천히 흘러갔다.
날갯죽지가 길쭉한 회색 새 한 마리가 강물에 바짝 붙어 날아가고 있었다. 이경은 그 새의 이름을 알았다.
「그 여름」에서


그 장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애를 보내면 마냥 후련하기만 할 것 같았던 마음이 어떤 두려움으로 바뀌던 순간을. 버스가 떠난 뒤에도 나는 터미널에 가만히 서서 모래가 탄 버스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찬바람에 몸을 떨었다.
 「모래로 지은 집」에서


외롭고 아픈 이별 한가운데 있더라도 만남을, 시간을, 기억을 부정하진 않기를.

오히려 누구인가를 향했던 폭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내 안에 자라났던 괴로움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해한 만큼 보듬어주기를, 괴로웠던 만큼 어루만져지기를.

나도, 당신도.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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