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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냄새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색이 있다면 아마도 연한 녹색일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나아지고 악화되는 것을 반복하는 환자들이 끝내는 좋아질 징조가 없을 때, 의료진과 보호자가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졌을 때 뭉근히 피어나는 냄새이다. 온몸 구석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체액이 본인의 체온에 의해 약간 발효가 되며 베어 나오는 그 동물적인 내음, 그래도 깨끗하게 해 보겠다고 반쯤은 의미 없는 소독과 드레싱을 하며 표피에 침적된 소독약의 핑크빛 그것, 막 소독을 끝내고 올라온 중방의 광목 내가 뒤섞이며 연한 녹색을 띠게 된다. 색이 연한만큼 일하는 동안 묘하게 차분해지며, 환자의 안색 또한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이 녹색을 놓치기 전에 가족들과 한 번 더 의미 있는 면회가 있었으면, 강을 건너기까지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스며드는 그것이다.
보라색이 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출혈과 그만큼 들이부어지는 수액들이 이루어낸 반갑지 않은 냄새이다. 어디론가로 붉은 혈액을 휙휙 잃어가지만 그 빈 곳에는 차가운 생리식염수와 알부민이 곧장 채워진다. 붉었던 혈관은 점점 보랏빛의 냄새를 풍겨대고 어느 정도의 한계를 넘어가면 진한 보라색이 아닌 삽시간에 칠흑 같은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끝이야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적색의 내음을 풍기려고 안간힘을 써단다. 의사는 안절부절 초응급수혈의 처방을 내고 간호사는 얼른 혈액은행에 연락하고 조무원은 뛰어다닌다. 보랏빛을 붉게 만들기 위하여 이토록 검붉은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달콤한 크림색은 애틋함에서 피어난다. 다른 속물적인 계산이 없는 온전히 환자를 위한 보호자들의 손길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들 사이에서 진심이 보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탄생되기도 한다. 질병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을 환자들의 흐리멍덩한 동공에 대고 내뱉는 단단한 위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지금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꼭 쥔 손가락 사이로 크림처럼 새어 나온다. 낭창한 목소리,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북돋던 의료진의 강인한 눈썹, 업무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달콤한 예의는 그들이 등장하는 걸음걸이만으로도 포근한 크림색 구름이 퐁퐁퐁 자라나곤 한다. 나이팅게일이나 슈바이처의 체취는 분명 같은 색이었을 것이다.
가을 하늘의 쪽빛보다 강인한 하늘색을 칭하는 단어가 따로 없음이 안타깝다. 푸르고 또 푸르다. 차가운 탄산수처럼 명쾌한 그 냄새는 성공적인 익스투베이션이 이루어진 환자의 숨결에서 뿜어져 나온다. 어찌나 맑고 강력한지 그것을 바라보는 의료진의 눈망울로 곧장 반사되어 그들의 눈빛은 하늘색으로 하늘하늘거린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각종 오물로 꽉 막혔던 세면대가 마치 수챗구멍이 없는 것처럼 뻥 뚫린 느낌까지도 전해진다. CRRT를 끊고도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소변에서도, 각종 약물 때문에 일주일이 넘게 밀려있던 아랫배의 단단한 그것이 탈출했을 때도 푸른색을 맡을 수 있다. 비록 다른 냄새와 섞였을지라도.
물감은 섞을수록 탁해지고 검어진다. 아무리 훌륭한 향수라도 잘못 블렌딩을 하면 단순한 악취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반면 빛은 서로 겹칠수록 밝아지고 투영해진다. 이곳에서의 냄새와 그것이 뿜는 색은 다행히도 빛과 그 성질이 많이 닮아있다. 비록 아름다울 수는 없어도 모든 색은 의료진과 환자들이 사투를 벌인 땀냄새다. 삶의 결실이고 치열한 생명의 한 복판이다. 오늘은 어떤 냄새를 많이 볼 수 있을까. 날도 많이 시원해졌는데 쪽빛의 풋내음을 맡고 싶은 출근길이다.
당시 방영되었던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착안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