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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미자라서 미안

1511

사람은 원래 다 별로다. 그중 조금 더 별로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한창 감성이 넘쳐나던 시절부터 시나브로 자리 잡고 있던 이 명제는 최근 한 프로그램의 허지웅이라는 작자로부터 재발견되었다. 나만 이렇게 느끼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동질감이 오래간만에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기대를 잘하지도 않고, 그래서 실망하는 것도 별로 없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는 세상에 반하는 개념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냉정하게 보자면, 웬만한 것들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그런다고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이 하루만 지나면 무안해지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밉다는 것은 어떤 굵다란 선을 넘어섰다는 뜻이 된다. 


병원이라는 곳은 참으로 거대하면서 말할 수 없이 협소하다. 막상 헤아려보면 그리 많지 않은 직군들이 방직기의 실패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서로의 업무에 대한 관여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가 뒤틀리면 그 파장이 대단하다. 게다가 모든 결과는 곧장 환자에게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결고리 덕에 서로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직적이다. 위계질서의 끝판왕이다. 오오, 이 피라미드는 참으로 무겁도다. 게다가 살벌하기 짝이 없다. 이쯤에서 다시 명제로 돌아가 사람은 다 별로니까, 기대 따윈 애초에 접고 그저 묵묵히 업무만을 해치운다면 어떻게든 일당을 벌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점점 미워진다면, 이렇게 유기적인 개미집 같은 곳에서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가 행하는 간호 철학이 무엇인지 이해도 가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굳이 나열하기도 싫다. 나열해야 하는 수고조차 지면이 아깝고 입술이 번거롭다. 인계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히 거북하고, 같은 듀티에 일하는 것도 격렬하게 거부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 병원이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 미워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끝까지 미워하기에 무척 쉬운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너만큼 나도 별로이기는 매 한 가지이므로 차마 검은 감정의 막장까지는 가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부르짖었던 명제에 대한 눈곱만큼의 자존심인 것이다. 다만 네가 나보다 조금 더 별로이길 바라며 주변인들에게 살풀이를 할 뿐이다. 


눈 한 번 딱 감고, 뱀 같은 나의 혀가 이끄는 대로, 송곳 같은 내 집게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천박하기 그지없는 내 가슴이 지껄이는 대로 악담을 퍼부어주고 싶다. 그런 것은 무척 쉽다. 하지만 그러한 몰아세움은 쌍방 감정의 소모일 뿐이다. 누구에게도 이득 따윈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너나 나나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며, 나름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존재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경멸하기에 나는 그렇게 잘나지 않았다는 거다. 병원은 일하는 곳이다. 이곳은 사교장이 아니니까 나는 너와 업무만 주고받으면 된다. 나는 그저 네가 밉상일 뿐, 병원 입장에서는 너는 전혀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 밥에 그 나물일 텐데 누가 누구에게 뭐가 묻었다고 낄낄대는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인 거다. 


저기 초록색 옷을 입은 네가 걸어간다. 그래, 너는 뒷모습도 참 별로다. 슬그머니 뭔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것은 네 잘못은 아니다. 이런 느낌을 갖는 것 자체가 싫어서 표면적으로나마 잘 지내보려 몇 번이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이마 한 복판의 붉은 여드름처럼 트러블이 툭툭 돋아났다. 그때 나는 상자를 닫았다. 업무에 대한 최소한의 대화, 너와 나는 그저 이 정도의 거리가 딱 좋은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일 것이고-가장 높은 확률로 그게 너일 가능성이 크지만-그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관계일 것이다. 그 당사자한테는 미리 사과를 하고 싶다. 이렇게 별로라서 미안해요. 미(움받는) 자라서 미안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어차피 우린 모두 별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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