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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저녁 맛있게 먹어요

1602

안녕들 하신가. 갑자기 웬 할머니가 등장해서 놀랐을 텐데 굳이 누군지 몰라도 됩니다들. 끄적끄적 동화랍시고 몇 가지 써놓고, 운 좋게 인세나 받아먹으며 사는 흔한 노인네일 뿐이오.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요샌 치매도 슬슬 오는지 자꾸 뭔가 까먹는 몸뚱이인 걸. 리모컨 같은 걸 냉장고에서 찾는 건 일도 아니라오. 엊그제는 오렌지즙이 먹고 싶더라고. 마침 홈쇼핑에 괜찮은 착즙기가 보이길래 주문했더니, 식탁 옆에 예전부터 쓰던 게 있었지 뭐야. 심지어 완전히 같은 모델이었어. 스스로 한심해서 울었지. 게다가 이따금 있는 원고 마감일을 미루는 수준이 아니라 원고를 써야 하는 자체를 새까맣게 잊는 일도 있어서 앞으론 내 담당자가 수시로 알려 주기로 했어. 친구의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해서 무신경하게 요리법이나 물을 정도로 성격도 별로라서 친구도 별로 없소. 아들도 날 싫어해. 이쯤에서 뜬금없는 질문. 이토록 궁핍한 나에게 삶은 무엇일 것 같소?


우연찮게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간호사를 알게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어요. 무시무시했지. 건들면 폭발할 것 같은 의료장비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다면서? 욘사마가 나오는 겨울연가나 겨우 DVD로 보는 수준의 기계치로서는 정말이지 소름 끼치는 일이에요. 게다가 환자들은 넋이 나간 채 숨도 인공호흡기로만 쉬고 있다면서? 어우, 내 횡격막이 다 뻐근한 것 같아. 잠깐 심호흡 좀 하고 마저 대화를 이읍시다. 휴. 


그 간호사가 안타까워하는 게 하나 있더라고. 일을 하다 보면 식사 시간이 있잖아? 그럴 때 환자를 두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죄책감이 든다는 거야. 그나마 의식이 없다면 얼른 다녀오면 되는데 의식이 또렷해서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환자들을 두고 밥을 먹고 오는 게 굉장히 미안하다는 거였어. 그래서 양치질을 더 열심히 하게 된대. 밥 냄새라도 풍기지 않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희한한 건 그 환자들은 항상 자기한테 밥 많이 먹고 오라고, 맛있는 것 먹고 오라고 그런다는 거야. 그럴수록 더 죄스러운 마음은 더 들고 말이지. 그래서 내가 그 간호사 등짝을 세게 때려줬어. 예끼, 이 사람아! 하고 소리도 치고. 


나도 암을 앓고 있어. 유방을 잘라내고도 재발했지. 이번엔 6개월 정도 남은 모양이더라고. 시한부 인생을 진단받자마자 내가 한 짓은 뭔지 알아? 재규어라는 수입차를 질러 버린 거야. 그거 사고 남은 돈으로도 일 년은 먹고살다 갈 수 있겠더라고. 그 차를 끌고 지인들의 모임에 나갔지. 한 여자가 비아냥 거리더라고. "당신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재규어는." 참나. 뭐라 지껄이는 건지. 내가 내 돈 쓰다 죽겠다는데 뭔 상관이람.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 사람과의 인연을 정리했어. 좋은 사람들만 만나다가 가도 부족한 시간이겠더라고. 그렇다고 세월이 아깝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이만하면 살만큼 살았어. 더 사는 것도 죽을 만큼 피곤해. 다만 나는 되도록 마무리가 뭔지를 알고 싶을 뿐이야. 


 "내 대신 맛있는 것 많이 먹어줘요. 죄책감 같은 건 느낄 이유 없어요. 내가 아픈 만큼 더 열심히 살아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무예요. 나는 살만큼 살았고, 조금만 더 살고 싶어. 그저 연장의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마무리를 하고 눈을 감고 싶을 뿐이에요. 건강하게 더 살고 싶은 건 아니냐고 묻는다면 부정은 못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내 병을 알아. 무병장수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이 곳에서 삶을 마무리 짓고 싶진 않아요. 어떻게라도 나아져서 가족들을 하루라도 더 보고 멋진 유언 같은 것도 남기고 싶어요.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즐겁게 식사하고 힘차게 나를 간호해줘요. 그래야 나도 더 좋아질 것 같아." 


그 간호사가 마주하는 환자들의 심정은 분명 저럴 것이야. 내 장담하지. 이따가 또 까먹고 같은 소리를 반복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내가 앓고 있는 암은 덤 같은 거야. 끝을 알고 차분히 준비할 여지가 주어진단 말이지. 셋 중 하나는 암으로 죽어. 아주 평범하고 흔한 일이라고. 간판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괜찮은 편 아닌가. 


좌우간 그 간호사가 좀 알아들었으면 좋겠어. 늙은이의 쓸데없는 참견이라 여겨도 괜찮아요. 이제 슬슬 졸리네. 내 얘기 듣느라 수고 많았어. 저녁 맛있게 먹어요.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읽고 저자 사노 요코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상을 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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