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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기승전

1603

그녀 둘은 각자 두 명의 아이를 가졌고, 심지어 애들의 나이도 똑같다. 다만 하나는 형제, 다른 하나는 남매다. 전자는 아들만 둘이라 그런지 약간 방임형으로 키우는 주의라 그나마 여유가 있어 보이고, 후자는 큰 애가 일곱 살인데 아직 유치원에 보낸 적이 없다. 항시 끼고 살다가 학교 보낼 계획이란다. 뭐,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니고 신경 쓸 바는 아닌 데다가 적당히 유난스러우면서 억척스럽지는 않은 친구들이라 별 일이야 있겠냐만 간만의 외출에 한껏 들뜬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다. 분명 커피와 재즈에 환장하던 애들이었는데 지금은 유치원과 교육방식, 그리고 애 자랑뿐이다. 모카 포트에 원두가루를 압출하던 그들이 뜨뜻한 물에 분유를 살살 개며 너무 지들 자식 얘기만 하길래 김혜수가 열연하는 드라마 '시그널'을 화두로 던지자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수사물은 무서워서 못 보겠단다. 얘, 피와 살이 튀는 미드 수사물을 처음 나에게 접하게 해 준 건 너야. 그건 그렇고 갑자기 쳐낸 앞머리는 어려 보이고 싶었던 거니? 차라리 보톡스를 맞자. 소개해 줄게. 


성적이 전교 탑이라 항상 자랑스러운 내 친구 부동의 1위였던 그는 저번보다 조금 더 살이 찐 것 같고, 꽤 피곤해 보였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것 같은 이유는 네 살 난 아들내미가 아침 댓바람부터 깨워라기 보다는 오늘 아침 갑자기 3년 정도 늙은 것 같기 때문이라며, 유리잔에 맥주를 가득 따르면서 말했다. 지들 부부가 버는 수입이 합치면 꽤 짭짤해서 둘째를 낳아도 전혀 무리가 아닌데 아내가 철벽방어라며 시무룩해했다. 하나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냉정히 말해 투자는 분산투자가 정석이며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것이 아니라고 은행 다니는 티를 냈다(이 대목에서 다른 애가 '아, 맞다. 집에 계란 떨어졌는데'라고 탄식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외로워 보이는 아들내미가 안쓰러워 그렇단다. 그러곤 다시 맥주를 들이키며 '지방간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장착하는 거지!'라며 약간 상기된 얼굴로 외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누라도 아닌 내가 슬그머니 비타민을 챙겨주고 싶어 졌다. 


뜬금없이 인도어과를 선택해서는 한동안 요가에 꽂혀 거의 헐벗고 다니더니 또 어이없이 건설회사에 취직하더니만 난데없이 고등학교 동아리 선배와 결혼해버린 그는 작년에 훌쩍 사우디로 파견을 나가더니 그저께 귀국했다. 그의 깜짝 출현보다 놀란 것은 못 본 새 반백이 되어 있었던 머리칼이었다. 본래 나이보다 십오 년은 더 들어 보여 아직 대리인 주제에 직장에 찌들어 수완만 좋은 부장님 같아 보였다. 흰머리가 유전인 거 같다며 그나마 숱이라도 많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대뜸 보쌈을 먹자고 했다. 그쪽 나라는 돼지고기가 금지되어 있어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것이 너무나 그리웠단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육볶음부터 시작해서 주야장천 돼지고기만 찾고 있다고 했다. 게걸스럽게 보쌈 반 접시를 후딱 비운 그의 번들거리는 입술은 마치 오럴 케어를 하고 바셀린으로 말끔히 마무리한 환자의 그것 같아 보였다. 그러더니 자기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잘 안 들어선다고 총각인 나에게 최근 태몽을 꾸지 않았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다음 주 사우디로 돌아가기 전에 시험관 아기를 시도해보겠다는 다소 양계장스러운 얘기를 하더니만, 2차로 매콤한 닭발이 먹고 싶다고 채근을 해댔다. 작작 좀 먹어. 이 자식아. 그럼 2차는 드시고 싶은 부장님이 쏘세요. 


나는 사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애도 키우지 않고 있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지난번 다녀온 오키나와의 날씨 이야기를 하고 저번 달에 프리셉트를 독립시켰다고 했다. 그쯤 들어온 질문 하나는 지카 바이러스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미생물학자도 아니고 보건당국은 더더욱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흔히 받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필시 업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감염시킬 수 있는 모기가 있긴 하지만 일단은 모기를 조심하는 게 제일이며, 사실 예전부터 존재했던 바이러스이고 희한하게 브라질 쪽에서만 소두증 증세가 있는 걸로 봐서는 단순히 그것 때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답을 원래 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병원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환자들 중에 인플루엔자가 반 이상이다, 다들 예방접종은 했느냐, 안 맞았으면 내년엔 챙겨라,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거라고 한 손엔 닭발을 든 채 침을 튀어 가며 일장연설을 했다. 그때 애엄마 중 하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과연 기승전-간호네. 통화하면 쟤는 맨날 병원 얘기만 해. 깔깔. 나는 애들 얘기만 하고. 우리가 어쩌다 이래 됐니. 깔깔깔."


그래, 맞다. 모두가 고등학생이었고 모두가 가슴 한 가득 꿈이 있었다. 스무 살의 질풍노도를 함께 했고 같이 사랑했고 늘 술잔을 기울였다. 팻 매스니에 가슴이 떨렸고 코흘리개 돈을 모아 뮤지컬을 보러 갔었다. 그랬었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느새 잃어버린 꿈만큼 더 열심히 사는 것은 확실하다. 거의 반년 만에 만났어도 우리가 있던 테이블은 고등학교 동아리 시절과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주절주절 떠드는 소재는 달라졌지만 적어도 지껄이는 주체의 색은 많이 바래지 않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항상 변하는 것 같은데 결국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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