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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감자가 익는다

1604

퇴근길에 동네 마트에 들른다. 산처럼 쌓아 놓은 채소들 사이에 흙 감자가 보인다. 열댓 개 정도 묶어놓은 한 봉지가 삼천오백 원이란다. 포슬 하게 익게 생겼다. 지난 경주 여행 때 맛있게 먹었던 컵라면도 있다. 그리 대중적인 브랜드가 아니라 찾기 힘들 줄 알았다. 반가워서 세 개나 담는다. 내일모레쯤이면 지나치게 익어서 뭉그러질 것 같은 바나나도 있다. 한 덩이에 이천오백 원이란다. 총 팔천팔백팔십 원이다. 언덕길을 오른다. 현관문을 연다. 도시가스 점검이 올 예정이라며 언제쯤 방문 가능한지 묻는 쪽지가 붙어있다. 두 달 내내 나이트 근무만 할 예정이라 오프 때로 날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붉은 흙이 묻은 감자를 툭툭 쳐서 찬물에 넣는다. 다섯 개를 삶기로 했다. 감자칼로 껍질을 완전히 벗긴다. 탁한 물속에서 말간 속살을 둥둥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속옷 바람으로 부엌에 엉거주춤 부유 중이다. 흐르는 물에 감자를 다시 한번 닦았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눈을 질끔 감았다 뜨고는 얼른 삶아 내고 잠을 청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러고 보니 알이 꽤 크다. 반으로 쪼개서 삶아야겠다. 어떤 것은 삼등분을 했다. 물을 부었다. 지저분한 거품이 일어 한 번 더 헹궜다. 아, 소금. 소금을 잊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덕망 있는 요리사가 나와 스파게티면을 삶을 때 소금은 정말 한 주먹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방송에서는 지나쳐 보일까 봐 한 소끔 정도로만 편집되지만 바닷물처럼 짜야 간이 면에 배어 감칠맛이 난다고 했다. 요리가 싱거우면 남은 면수로 간을 맞출 수도 있다고 했다. 좋은 건 따라 해야지. 밥숟갈로 크게 두 번 떠 넣는다. 휘휘 젖는다. 간을 본다. 서해 맛이 난다. 


가스불에 올린다. 강한 불보다 조금 약하게 하고 뚜껑을 덮는다. 식탁 의자에 앉아 팔을 괴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진다. 몇 년 전만 해도 나이트 근무만 마치면 전철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곤 했었는데. 피곤에 절은 다 큰 남자가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전철이 가고 설 때마다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모습은 공포에 가까웠을 수도 있었겠다. 지금은 퇴근길에 책과 잡지를 엄청난 집중력으로 읽어내다가 버스로 환승한다. 잠들지 않을 만한 체력도 되었고, 무엇보다 일만 하고 잠만 자다가 지나가는 하루가 언제부턴지 아깝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업무가 과도했던 날엔 그런 체력은 남아있지 않기에 잔잔한 음악을 귓가에 걸어놓고 사람 구경을 한다. 저 사람은 신입사원이구나. 포마드를 잔뜩 바른 머리가 나까지도 긴장하게 만든다. 구두에 길이 들지 않아 발뒤축이 아플 것 같다. 그 반듯한 헤어 스타일이 조금 편해지고 구두가 보드라워지면, 오늘보다 나은 출근길이 될까. 아니면 조금 더 익숙할 뿐일까. 익숙한 것이 꼭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솜털까지 긴장한 모습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아, 감자. 감자가 익었을까. 쇠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본다. 들어가다가 곧 만다. 아직이다. 


속옷바람이라 역시 썰렁하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오 년도 넘은 면바지를 입는다. 입고 태어난 것처럼 편안하다. 중환자실에서 늘 입는 녹색 특수복은 아직도 어딘가 불편하기만 한데. 그것이 내 옷처럼 느껴지는 날이 오진 않을 것 같다. 그 감각은 일과 삶을 항상 분리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안일해지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시니어도 프레시맨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적당히 내린 결론일까. 아니면 무른 허세일까. 갑자기 어깻죽지가 쑤신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일부러 욱여넣은 소금 때문에 감자가 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포트에 조금 물을 데워 끼얹어볼까. 간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아직 덜 익은 감자도 미덥지 않고 뜨거울 때 느껴지는 간은 식었을 때랑은 또 다르기 때문에 그것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다. 아, 그냥 두자. 싱거우면 소금이라도 쳐서 먹고, 짜면 달걀을 삶아 섞고 마요네즈를 넣어 섞어버리면 그만이다. 뭐 대단한 감자 삶겠다고 이리도 우유부단한 것인지. 


대뜸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 있는데 이번 달에 당신 생신이 있으니 그것을 사서 대령하라고 했고, 그걸로 어버이날까지 퉁치면 될 것이라 했다. 그래요, 어머니. 그래서 내가 다음 달까지 나이트 킵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인제 새파랗지도 않은 아들놈이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당신 생신 이외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 감자를 잘 삶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아까 젓가락으로 찔렀는데 반 밖에 안 들어가던데, 에? 지금 다시 해보라고요? 음, 어라? 쑥 들어가네. 언제 이렇게 익었을고. 이제 불 끄고 살짝 식혀서 먹으면 되는지요. 물을 아주 조금만 남기고 버터를 한 숟갈 넣고 조금 태우는 느낌으로 달달 볶다가 마른 파슬리 가루랑 파마산 치즈를 넣고 한 김 빠지면 기가 막히다고요? 어머니, 소자의 냉장고엔 버터가 없소. 파슬리 말고 파는 안 되겠소?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였는지 몰랐소. 일단 나는 잘 익히기라도 할게요. 


삶이든 감자든 뭐든. 둘 중 하나라도. 




'나이트 킵'이란 한 달동안 밤근무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프 수가 좀 더 많고 야간수당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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