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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각자의 언어

1703

최근 개봉한 '컨택트'라는 영화가 있다. 1997년도에 조디 포스터가 열연했던 것을 리메이크한 영화는 아니다(그것도 꽤 괜찮다). 천재 감독 드니 빌뇌브가 가진 재능의 정점이랄까. 엄청나게 몰입을 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선 박수를 쳐댔다(옆에 있던 친구가 말렸지만). 문과계의 '인터스텔라'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훌륭하게 접근했고 멋지게 풀어내었다. 그중 가장 집중하고 숨이 가빠올 만큼 흥분했던 것은 바로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하는 부분이었다. 문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이 곧 영화의 여정이었고 플롯이었으며 줄거리였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내내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써먹을 데라고는 수능 볼 때뿐이었다. 그 와중에 느낀 것은 영어라고 하는 언어는 주어 다음에 바로 동사가 붙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중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생각을 언어로 한다. 이미지로 진행되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언어를 습득하기 전에 이뤄지며 이후에는 언어로 사고가 진행되는 부분이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동사가 앞에 붙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분명 사고방식에 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한국어를 쓰는 우리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라는 문장을 매우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얼마 전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판결문만 봐도 수많은 반전이 있지 않았는가). 또한 지구에서 가장 비꼬았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잘도 그러겠다'라는 문장이 존재하는 언어를 쓰고 있다. '잘'이라는 긍정적 부사와 '그러겠다'라는 미래형 평서문이 만나 상대를 조롱하는 문장이 되다니. 굉장히 세련됐을 뿐 아니라 풍자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곧 우리의 사고방식의 색을 나타낸다. 


주인공은 외계인의 입장에서 언어를 이해하려 한다. 동시에 그들에게 지구의 언어를 알려주려 애쓴다. 두 부류 모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생각을 하기에 그 갭은 엄청나다. 게다가 참을성 없는 주변에서는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다가는 저들이 우리를 침공해버릴 것이라고 압박을 해댄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압박 속에서도 끝까지 서로의 언어를 공유하고 끝내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큰 변화를 맞이한다. 결국은 상대를 이해하려 하는 시도 자체가 소통이고 그것이 곧 이해라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우리는 환자와 소통을 해야 한다. 인투베이션을 한 채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 싸우는 환자들, 매우 간단한 의사소통은 되지만 약물이나 중환자실 자체에 대한 혼란이 있어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경우도 많다.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보드판에 마카로 애써 하고 싶은 말을 쓰기도 하지만, 손에 힘이 떨어져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환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아내야 한다. 굉장히 가려운 곳이 있다던가, 특정 부분이 아플 수도, 단순한 요구사항일 수도, 본인의 상태를 궁금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알려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처음과 끝의 개념이 사라진 동그라미 모양의 표의문자로 우리를 이해시키려 했던 외계인들처럼 환자들은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비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행하는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을 해서 이해시켜야 한다. 마치 외계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전하며 해치려는 의도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진의를 필사적으로 나타냈던 그 주인공처럼-치료를 위해 모든 의료진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불안해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곧 가족들의 면회가 있을 것이다. 지금 가래를 뽑으려 하니 너무 놀라지 않길 바란다. 욕창이 생길 것 같아서 실례지만 엉덩이를 살펴봐야겠다. 식사는 할 수 없다. 배고픈 것은 잘 알지만 지금은 위장에서 출혈이 있는 것 같아 금식을 해야 한다-이러한 각고의 노력과 통증에 대한 경각심이 대두되는 시점에 등장한 것이 비언어적 통증 사정 도구인 CNPS일 것이다. 어느 한 바이탈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적인 환자의 표현을 아우르는 방식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시도 자체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환자의 알 수 없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굉장한 인도주의적인 도구인 셈이다. 물론 진심이 닿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정말이지 그럴 때면 환자들은 그들만의 '환자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쩐지 믿음직하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환자어'가 환자들의 사고를 잠식한다. 그들만의 언어로 생각을 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표현을 한다. 심지어 약물에 취한 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찌그러진 동공, 잔뜩 부은 팔, 벌겋게 부르튼 입술로. 그리고 나선 익스투베이션과 동시에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언어를 습득하지 못해 독자적인 생각을 짜내었던 유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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