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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당긴다 당긴다

1804

당긴다. 당긴다. 배가 당긴다. 갈색으로 잘 물든 족발 같은 것도 먹고 싶다. 차가운 소주 한 잔도 너무나 당긴다. 하지만 데이 근무를 마쳤더니 아침보다 종아리가 더 뭉친 것 같은 느낌이라 이대로 누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부재중 통화 3통, 메시지가 17개가 확인을 기다리고 있다. 전화는 모두 시어머니, 이 사람은 내가 일하는 동안은 연락이 전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당신 아들이랑 같이 산지 벌써 3년이 넘어갔는데. 병동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는 것을 외부전화는 연결이 전혀 안 된다는 거짓말을 해가며 간곡히 거절했기에 망정이지 신환을 받으면서 동시에 시어머니 전화까지 받을 뻔했다. 메시지는 시댁 식구들로 이루어진 단톡 방에서 온 것이 12개, 나머지는 광고였다. 빤한 내용이겠지. 저녁때 넘어오면서 자질구레한 것들 사 오라는 것과 몇 시쯤 올 것이냐는 물음뿐이겠지. 심지어 맞춤법도 하나도 맞지 않은 그들만의 수다. 감기 기운이 있다는 남편의 말에 무슨 신생아도 아니고 왜 자꾸 낳으라는 건지. 감기는 낫는 게 아니라 낫는 것입니다. 어머님. 


임신 8개월에 굳이 제사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몸이 무거워 힘들면 오지 말라고 선심 쓰듯 두 번이나 언질 했으면 마지막에 올 거냐고 다시 묻지를 말아야지. 그게 정녕 오지 말라는 뜻인가. 게다가 옆에서 아무 말하지 않고 있는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야말로 ‘남’의 ‘편’인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내가 왜 당신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조상들에게 뭔가를 해다 바쳐야 하느냔 말이다. 첫 해에는 뭣도 모르고 오프까지 써가며 참여를 했다만, 이번 해는 일부러 데이 근무를 신청해가며 안 가려고 발악을 한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꼴이 되어 버렸다. 결혼 전엔 집안에 관심도 없더니 해가 갈수록 시아버지와 똑같아지고 있다. 깎아주는 사과를 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는 버릇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현신 수준이다. 유전자에 사과는 한 입에 먹어야 하는 프로그램이 새겨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부러 씻지 않고 시댁으로 갔다. 머리는 떡이 져있고 몸에서는 땀내가 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전 부치느라 콩기름에 절여질 테니. 가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큰 애는 잘 놀고 있다고 했다. 오늘 밤은 데리러 가기 어려울 것 같고 내일까지 부탁한다고 했다. 엄마 좋아하는 꽃게 사 가지고 내일 들르겠다 했다. 시큰둥하던 엄마의 대답의 결이 달라졌다. 아, 뭔가 얄밉다. 사 가지고 가지 말아 볼까. 


예전엔 열두 시 넘어서 했다며 아홉 시에 제사를 당긴 것은 자신이 얻어낸 투쟁의 역사라고 마치 깨어 있는 척 구는 늙은 여자가 문을 열자마자 나보고 행색이 그게 뭐냐고 대뜸 묻는다. 좀 피곤하네요,라고 했지만 데이 근무를 마친 간호사이지 내일모레면 불혹인 제가 대체 어떤 꼴이길 원하세요,라고 받아치고 싶었다. 나는 당신 앞에서는 당신이 매일 갈아 마시는 유기농 채소처럼 늘 파릇파릇해야 할 이유가 있나. 이 시대 며느리는 항상 신선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졌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대충 저농약 얼갈이 정도는 된다. 이 시어 빠진 고들빼기 같은 사람아.


아까 말한 밀가루는 사 왔느냐고 묻는다. 부침가루로 사 왔다고 하자 안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그런 걸 제사상에 올려야 하느냐고 또 시비를 건다. 당신이 좋아하는 식재료 브랜드에서 나오는 최상급 부침 가루라고 하자, 어쩔 수 없지 뭐, 시간 없으니 일단 그걸 쓰자고 한다. 그렇게 예쁜 말을 하는 당신의 혀 위에 군림하는 백태가 더 안 좋을 것 같은데, 입 냅 새도 저번 주보다 조금 더 심해진 것 같다. 


거실에는 등대처럼 시아버지가 앉아있다. 입으로는 인사를 하는데 눈은 내 배에 고정되어 있다. 이어 정말 제왕절개를 할 거냐고 묻는다. 안 그러면 자궁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제왕 절개하면 아이의 아이큐가 낮더라는 이상한 이론을 들이댄다. 이봐요. 이건 내 몸이고 내 자궁이고 내 아이예요. 뭘 어떻게 낳든 당신 손주이기 전에 내 자식이라고요. 열 달 동안 당신 좋으라고 하지정맥류까지 얻어가며 치질까지 생겨가며 품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아이큐요? 그렇다면 당신 아들은 분명 제왕절개로 태어난 모양이죠. 안 그렇다면 그렇게 한심 할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나는 요새 기술이 좋아서 괜찮을 거라는 헛소리로 응대로 말았다. 혈압이 오르는 것 같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느낌도 좀 든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절대 빠질 수 없는 회식이 생겼다는 남편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 하아, 이놈을 어쩌지. 그 회식을 잡은 상사 놈까지 한 솥에 삶아 버리고 싶다. 당신이 직접 어머니한테 말해,라고 답해주고 폰을 꺼버렸다. 앞치마를 둘렀는데 배가 너무 나와 언젠가 보았던 구마모토의 검은 곰 같이 보인다. 고사리와 숙주는 미리 무쳐놓았다는 시어머니의 말에 감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헷갈렸다. 대충 대답하고는 녹아가는 동태에 밑간을 시작했다. 차갑고 단단한 그의 체온이 불처럼 일어나는 내 화를 잠시 다독이는 것 같았다. 러시아 근해에서 잡힌 너는 무슨 팔자로 지금 제대로 된 형태도 없이 소금과 후추를 머금고 뜨거운 팬 위에 올라가려 하느냐. 그러는 나야말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작자와 결혼을 한 것이었느냐. 혼자가 그리도 초라할 것 같았느냐.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 기억나느냐. 그런데 어째 지금 이 순간에 소외감이 드는 것이냐. 동태, 너는 적어도 내가 맛있게 부쳐주마. 이렇게 꼬인 나의 삶은 나도 잘 모르겠으니 이왕 이렇게 발라진 너의 살, 최선을 다해 구워내는 것이 너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아아, 눈물은 무슨. 그딴 건 개나 주라지. 끊임없이 화가 난다. 싹 관두고 싶다. 병원은 사직이라도 할 수 있지. 알토란 같은 큰 애와 뱃속의 소중한 둘째 덕에 나는 고민조차 죄짓는 기분이 든다. 죄인도 아닌데 왜 자꾸 무릎을 꿇는 기분이 들까.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대출금도 착실히 갚고 있는데. 파를 다듬으며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잔소리를 하는, 뉴스를 보며 욕을 하는, 술이나 신나게 마시고 있을 당신들과 다를 바 없는데. 




동료간호사의 푸념을 토대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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