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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훔치고 싶은 밤

1803

그렇게 연연하는 편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타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루하루 목매어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진심으로 느껴지는 묵직하거나 혹은 가벼운 덩어리가 아닌, 관성처럼 흐르는 타성에 얹혀 등 떠밀리는 모든 상황을 늘 경계한다. 그래서 아주 작고 비록 슬픈 것일지라도 굳이 스스로 선택하는 쪽으로 흐른 것이 내 축적된 삶의 방식이다. 후회할 기억은 종종 있을지언정 적어도 누군가를 책망하는 일은 없게 된다. 모든 결과가 홀로 택한 것인데 대체 누굴 탓할 것인가. 비록 나락으로 빠지더라도 그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었고 내 과업일 뿐인 것이다. 같은 시선에서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 행복해야 한다고 세뇌하는 이들에게 왜 행복해야 하냐고 반문하며 조소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곤 했다. 삶의 흐름 속에 이런저런 기쁨을 자연스레 발견하는 것은 보물 같지만, 항상 그것을 찾아 해 맨다면 그것은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한낱 도굴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는 중이다. 누구나 버텨냈을 신입 초반에는 당연히 여러 부침이 많아 안부전화를 할 때마다 죽는소리를 해대며 자주 본가에 들러 또 앓는 소리를 이어갔다. 그런 식으로 일 년쯤 지났을까. 더 이상 병원 얘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남 생각은 하지 않고 터져 나오는 것들을 쏟아내다 보니 어느덧 감정의 플랫 선-현자 타임이 온 것이다. 업무가 슬슬 손에 익는 때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스스로 자제한 이유가 더 컸다. 미간에 주름잡고 힘들다고 징징대는 다 큰 남자를 상대하는 중년 부인의 심정이 얼마나 피곤했을지 이제야 가늠이 되는 타이밍이 도래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병원에 대해 별 언급을 안 하기 시작했던 때가. 그 시점부터 나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직장인 중 하나일 문이고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남들이 보기에 업무 시간만 불규칙하다는 점이었다(실은 데이, 이브닝, 나이트-이렇게나 규칙적인데 말이다). 헬조선이라며 같은 하늘 아래 모두가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하니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기를 지배하는 피로감을 피할 수는 없을 테고 적어도 그것에 얽매이지는 말자고 다짐하기 시작했다. 피곤하면 푹 자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멋진 영화를 보며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단단하게 굳혀갔다. 


오래간만에 본가에 들러 이틀 쉬고 나이트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모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방에 들어가 15분 넘게 도란도란 대화를 잇는 중이었다. 


“걔 좋아서 일하는 거 아냐. 적당히 돈 주니까 그만큼 일하는 거지. 행복지수가 100이라면 걔 아마 20도 안 될 걸? 간호사가 좋아서 편입까지 한 거 아니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성격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먼 친척에 대해 험담을 하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어머니의 문장이었다. 


조금 놀랐다. 아니, 적잖이 놀래 버렸다. 아아, 다 알고 있었구나. 몇 년째 표현하지 않았어도 많은 것을 감지하고 있었구나. 행복에 연연하지는 않아도 느껴지는 정도는 딱 저 정도였는데 그것까지도 섬세하게 이해하고 있었구나. 마냥 마이너스 에너지를 내뿜는 아들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그렇다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내놓기도 어려운 것들이 아니었는가. 때로는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곤 한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 이해의 경계까지 한 발 들어놓은 어머니의 어퍼컷은 뭐랄까, 대지 같은 것이었다. 따뜻하고 넓다. 비옥하고 믿음직스러웠다.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무한한 안정감이었다. 


종아리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아아, 우리 집 개가 천천히 핥는 중이었다. 손을 뻗어 가슴털을 만졌다. 북 실한 콧등을 쓰다듬었다. 검은 정수리의 냄새를 맡았다. 고소한 풋내가 났다. 그때쯤 어머니와 이모의 통화가 끝났다. 살짝 헛기침을 하고 넌지시 외쳤다. 


“나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아, 어머니.”


평소 같았으면 편안한 노래를 들으며 가볍게 올랐을 병원으로 가는 낮은 언덕길을 그 날은 음악도 없이 걸어갔다.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거스러미처럼 자꾸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실 그것의 정체를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은 알량한 마음 때문이었다. 


길 너머에는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유난히 커서 깜짝 놀랐지만 엊그제 뉴스에서 슈퍼 문이 뜨는 때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참으로 컸다. 게다가 붉었다. 두어 시간 정도 눈에 담다가 차가운 청주 한 잔 들이켜면 여한이 없을 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을 고이 접었다. 하긴 이렇게 막아내지 않으면 어찌할 것도 없다. 늘 되뇌었던 일상적인 단념 속에 걸음을 옮겼다. 


언덕 끝에는 편한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소다수를 들이키며 달을 관람 중인 모녀가 있었다. 오늘 저 둘은 원하는 만큼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슈퍼 문이 휘영청 떠오른 오늘 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소멸됐다고 생각했던 질투 같은 것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새삼 일하기가 딱 싫어졌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가슴이 개떡 같이 뭉그러졌다. 더는 달을 마주할 기분이 못 됐다. 그들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흐뭇한 표정으로 달을 애정 하는 댁들을 초연한 척 지나쳤지만 사실 나는 당신들의 밤을 훔치고 싶었어. 

그저 오늘 하루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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