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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눈에 우주

1901

눈을 감고 있습니다. 심박동을 가리키는 연두 색 선이 고릅니다. 붉은 포물선을 매끈하게 그리고 있는 혈압도 안정적입니다. 벤티레이터 또한 알람 따윈 원래 없는 기능처럼 차분히 숨을 넣고 있습니다. 마치 호박 같은 아궁이 불에 찬찬히 풍로를 돌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따스하고 나른하기까지 합니다. 쿨하게 각이 진 다섯 개의 플로 가드가 오와 열을 맞춰 환자의 곁에서 열심히 약물을 주입 중입니다. 환자는 약간 좌측으로 누워 있습니다. 하지와 엉덩이를 살포시 띄운 채 두 손을 모은 자세가 얌전합니다. 싱그럽게 청결한 반 시트가 첫눈처럼 하얗게 환자를 덮고 있습니다. 담당하는 의사도, 간호사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약물에 의한 진정(sedation) 상태의 환자들의 단정한 모습입니다. 아름답다고 하면 지나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눈을 열어 봅니다. 빛을 비춥니다. 동공이 움찔하는 것이 보입니다. 사실 부르는 소리에 자극을 받기엔 아직 이릅니다. 오늘 밤은 입실하기 전까지 전쟁처럼 사용된 폐를 비롯한 전신을 쉬어야 할 시간입니다. 벤틸레이터에도 조금씩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 의도로 여러 약물이 주입되고 있습니다. 안구가 탁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내일 아침부터 조금씩 깨워 낼 것입니다. 이토록 매연 같은 눈빛이 부디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열에 다섯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조금은 비루한 미래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눈 앞의 환자의 과거력을 냉정히 보건대 명쾌하게 깰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도 조심스레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가끔 병력과 상관없이 놀라운 삶의 의지와 그보다 더 강인한 인격으로 차분히 각성하는 환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릅니다. 간호가 조금 수월해집니다. 그럴 때면 우리도 사람인지라 힘이 드는 분들보다는 한 번 더 진심으로 손이 가고 그렇게 작은 정이 전달됩니다. 환자는 기도 가득 관을 물고 있는 와중에도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정말이지 초인 같은 인격입니다. 괜히 쑥스럽습니다. 우리는 그저 이 일을 하고 달마다 임금을 받는 월급쟁이일 뿐인데 말이죠. 


눈물을 잔뜩 머금은 보호자가 찾아옵니다. 다행히 서두르지 않습니다. 다만 환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비닐 가운을 입습니다. 일회용 마스크를 나름대로 착용했습니다만, 아뿔싸. 뒤집혀 있습니다. 민망하지 않게끔 새것을 가져와 제대로 씌워 드립니다. 비닐장갑도 드립니다. 환자의 손을 잡습니다. 각성 전엔 다들 이대로 깨지 않을까 봐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깨어나서 알아볼 것이라고 조심스레 위로를 전합니다. 이들 모두는 중환자실이 처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막 입학한 학생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윤리적인 부분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있는 그대로 답을 합니다. 이때 따뜻하되 현실적인 어투가 필요합니다. 희망 고문은 개인적으로 가소롭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도 중환자실에 적응해야 하지만 보호자 또한 그만큼 익숙해져야 합니다. 무사히 살아남을 경우 그 후의 과정에 대해서도 천천히 무장해야 합니다. 지금 같아서는 살아나기만 하는 심정이겠지만 조금 더 멀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사회적 기능이 단기적 혹은 장기적으로 셧다운 될 경우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한 집안의 우주에 돌이킬 수 없는 혼돈을 가져옵니다. 시꺼먼 블랙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보호자로 판명된다면 이러한 부분을 단단히 일러 드립니다. 이 싸움은 길 것입니다. 환자분도 힘드시겠지만 당신들도 만만치 않은 가시밭길을 걸을 것입니다. 똥과 오줌, 피와 가래가 튀어 오르는 그야말로 살아내는 것이 날것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부디 인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기나긴 싸움에 몸 마음을 공고히 만들어 두셔야 합니다. 입실하신 이상 어쨌든 버티셔야 합니다. 


다만 일반 병동에 올라갈 때까지 그 힘든 시간을 우리가 대신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 사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되 이것저것 스스로 알아보셔야 합니다. 추후 환자의 치료 계획에 대해, 그리고 후유증과 그것이 집안에 가져올 폭풍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셔야 합니다. 의견을 나눌 가족이 있다면 운이 좋은 편입니다. 오롯이 혼자서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메마른 사막에서 희미한 나침반으로 오아시스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작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자면, 어떠한 선택과 결과에 대해 아무도 당신읕 탓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지구에서 누구보다 많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면 보호자의 힘겨움을 덜어 줄 버퍼링 같은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끔한 해결책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 짐을 나눌 무언가가 있으면 합니다. 지금 이 타밍이에 타인에게 살짝 기댄다면 약간이라도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상쾌한 아침이 되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약물 중 하나를 멈추었습니다. 나긋하게 이름을 불러 봅니다. 힘겹게 눈을 뜨려고 합니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약간 더 명확하게 이름을 다시 호명합니다. 졸린 듯하더니만 이내 또렷하게 눈을 마주칩니다.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지릅니다. 붉은 실처럼 이어진 눈길을 떼지 않고 말합니다. 


기억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오셨습니다. 숨쉬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공기도를 삽입한 상태입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 같이 협력해야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습니다. 아마 죽을 만큼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습니다. 그 끝이 어찌 됐든 덜 힘들게끔 해드릴 것입니다. 밖에는 보호자가 기다립니다. 밤새 걱정하셨을 겁니다. 곧 만나실 수 있습니다. 힘을 내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을 깜빡입니다. 고운 부채처럼 펼쳐진 홍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아한 검은 동공 안에는 확고한 삶의 의지가 보입니다. 그래요, 눈 안에 작은 우주가 있었습니다. 어떤 혜성 같은 것이 날아오는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우주에 불시착합니다. 일종의 미스틱 한 조우 같은 것일 것입니다. 순간 본능적인 확신을 느끼며 힘주어 잡았던 손을 서서히 풉니다. 현실로 돌아와 다른 바이탈 싸인이 흔들리지는 않는지 다시금 살핍니다. 어딘가 불편한 곳이 없는지 매의 눈으로 스캔하며 잠시 퇴장합니다. 


당신의 보랏빛 우주가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그리고 최선을 다해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 끝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 무섭지만 그만큼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이따금 안심하고 당신의 찬란한 우주를 보여주세요. 당신의 곁엔 늘 우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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