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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홈 케어

1902

마른 논바닥처럼 여기저기 금이 가 있습니다. 외벽 쪽은 누룩 같은 곰팡이 흔적도 보이네요. 심지어 면이 고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침이 시멘트처럼 바짝 말라갑니다. 

큰 결심으로 들어낸 장판 이건만, 몇십 년 동안 쌓여있던 먼지들이 벌써부터 지치게 만듭니다. 청소기를 작동시키니 투명했던 먼지통이 금세 뿌예지더니 동시에 소음도 한층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냥 둘 걸 그랬나요. 아니면 업자를 구해보는 게 나았을까요. 이런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서서 괜히 혼자 리모델링해보겠다던 호기로운 태도가 문제였을지도 모릅니다. 후회가 20퍼센트쯤 드는 시점입니다. 


벽과 벽지 사이에는 진공 상태였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혼연일체인지. 둘이 딱 붙어서는 끌개로 열심히 밀어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자세히 보니 베이지색 꽃무늬가 찬란하네요. 마냥 화석 같을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복고적인 느낌이 좀 있습니다. 온통 체리색 가구가 유행이었던 시절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턴일 것입니다. 벗겨내는 것은 포기하고 지쳐 보이는 그 벽지 위로 크림색 페인트를 바르기 시작합니다. 사실 롤러로 하면 금방이겠지만 페인트 낭비가 심하고 무엇보다 지금 붓으로 발라 지는 느낌이 무척 좋습니다. 부드러운 카스타드 크림처럼 치덕치덕 색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시나브로 방을 물들여가는 중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집수리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중환자실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대강 칠십 세가 조금 안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 세월 동안 쓰던 육체는 이 건물만큼 참으로 많이도 닳았을 것입니다. 다 떨어져 가는 뒷 베란다 천장처럼 머리털도 거의 다 빠져나갔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대는 문지방처럼 관절도 뻑뻑하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환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숨 쉬는 것마저 고장이 난다면 과연 그것을 복구시킬 수 있을까요. 


망가져가는 오장육부를 위해 적절한 항생제를 택합니다. 그렇게 얼추 예상되는 균주를 야금야금 정복시키는 것처럼 결로 따위로 곰팡이가 예상되는 부분을 위해 단열 페인트를 골랐습니다. 꼼꼼하게 바릅니다. 혹시나 색이 변하더라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골든 헤이즈 색을 택해 한 번 더 덧칠하기로 합니다. 폐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면 인공호흡기의 적용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기존 장판에는 큰 문제가 보이지 않아 완전히 제거할 필요까진 없어 보이네요. 다만 침실로 쓸 예정인 방은 싹 걷어내기로 합니다. 하아, 언제 다 끝내지요?


맨 살을 드러낸 바닥에 락스를 풀어 거의 적시듯 도포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벽까지 타고 오른 곰팡이를 박멸시키려면 두 번 정도 반복해야 합니다. 콧날이 매캐해집니다. 항생제를 희석할 때 훅 하고 끼쳐오는 것과 흡사합니다. 어쨌거나 깨끗하게 치유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확실한 청결의 냄새랄까요. 

하루 지난 후 보일러를 충분히 작동시켜 완전히 말립니다. 곰팡이 방지제까지 들이붓고 하루 더 말립니다. 손에 묻힌 알코올 젤도 완전히 건조되어야 멸균의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구석구석 여섯 군데를 닦아내야 지긋지긋한 감염의 고리를 끊어 냅니다. 곰팡이 제거제 위에 방지제, 그 위에 항균페인트까지 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뽀얗게 마지막 페인트를 올리면 그럴듯한 벽 한 면이 완성됩니다. 아무런 균이 나오지 않는 환자처럼 어쩐지 흐뭇합니다. 


열이 멈췄다고 환자의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중환자실은 전혀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작 벽 하나 장판 몇 평 손봤다고 해서 그것을 집수리라 일컬을 수 있을까요. 몰딩과 방문 그리고 손잡이의 컬러가 맞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경건한 아몬드 색으로 맞춰보기로 합니다. 전동 드라이버로 경첩을 해체하고 낡은 방문을 떼어 냈습니다. 그간 숨어있던 먼지들을 훔쳐내고 젯소를 바릅니다. 그래야 페인트가 찰떡처럼 들러붙거든요. 다른 가구나 애써 교체한 바닥에 묻어나지 않도록 비닐 같은 것으로 씌워 놓습니다. 서랍장도 적당한 크기로 하나 사야 할 것 같아요. 베란다도 타일이 너무 더러워서 나무 타일판을 올릴 것입니다. 기왕 살 집 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이 낡은 집을 구하고 싶습니다. 녹록지 않은 일상에서 곳곳에 손 때가 묻은 집 안에서 휴식을 누린다는 것, 그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약물들로 환자의 상태가 결정 적으러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로지 그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우리의 손이 닿아야만 합니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말이지요. 


타일이 낡았습니다. 침상을 새하얀 시트로 바꿔둡니다. 드레싱에 진물이 새어 나옵니다. 물이 조금씩 떨어지는 수전의 밑동을 꼭꼭 조여 봅니다. 전등갓이 너무 구식인 것도 싫은데 안 쪽에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벌레도 몇 마리 있는 것 같습니다. 욕창의 단계가 바뀌었네요. 상처 부위를 수화시킬 수 있는 제품으로 바꿔야겠습니다. 서랍장을 조립해야 하는데 이거 만만치가 않습니다. 나사로는 한계가 있어 망치질을 꽝꽝 해댈 수밖에 없습니다. 예민한 보호자의 강성이 예상되는 부분입니다. 집수리가 완성되면 과일이라도 들고 그간 시끄러워서 죄송했다고 인사라도 할 작정입니다. 인공호흡기의 알람이 둔탁하게 울립니다. 습기가 가득한 화장실의 환기구를 교체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간단해서 환자는 다행히 금방 호흡이 좋아졌습니다. 이전 주인이 옷방 스위치를 반대로 설치해서 자꾸 거슬립니다. 모양이 이상했던 환자의 심전도는 알고 보니 접지의 방향이 반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얼른 떼어내고 복고풍의 그것으로 붙여두었습니다. 검은손 때가 탈까 스위치 뒤로 투명 아크릴판을 댓대었습니다. 혹시나 건조한 피부에 상처라도 입을까 배리어 크림을 엉덩이와 발바닥에 도포합니다.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환자를 고치러 갑니다. 그리고 퇴근 후엔 집을 정성껏 돌볼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고즈넉한 등나무 의자에 몸을 뉘이고 한숨을 돌리길 꿈꿉니다. 가열차게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멋진 들숨 그리고 황홀한 날숨을 내뱉길 바랍니다. 같이 쉬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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