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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물때가 묻은 거울을 봅니다. 화장실을 밝히는 노란 전구 등 아래 비추한 얼굴이 보이네요. 몇십 년 동안 늘 보던 것이지만 오늘따라 한층 더 낯설게 느껴지는군요. 이런 날이 있더라고요.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우울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기억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 날이 있더라고요. 왠지 볼도 조금 처져서 광대가 더 도드라지며 어쩐지 빈티가 나는 것 같기도 한 게, 그렇다고 혈색이 나쁜 건 아니지만, 뭐랄까, 흔한 겨울 날씨처럼 애매합니다. 바스락 거리는 머리칼 끝을 만져보자니 괜한 염색을 했다 싶다가도 이것마저 물들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몸매는 또 어떻고요. 그놈의 맥주와 치킨이 철천지의 원수지요. 나와야 할 곳이 나와줘야 하는데 들어가야만 할 부분이 나와있어요. 맞아요, 작년보다 더요. 그게 문제랍니다. 그렇다고 치맥을 끊었다가는 정신건강에 분명 해가 될 겁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죠.
몇 주 뒤면, 아니 이 글이 읽힐 때쯤이면 2015년이 시작되었겠죠. 그렇게 한 살 더 늙은 만큼 분명한 것은 기어코 몇 가지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세웠을 자신입니다.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니건만 어쩜 그리 희망에 찬 바람으로 화려한 계획만을 일삼는 것일까요. 지금 냉정한 연말의 가슴으로 따져보면 2015년 1월 1일이라도 해서 막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물가는 오를 테고, 불쾌한 뉴스는 판을 치고, 어쩐지 안 좋은 쪽으로만 시대가 기우는 느낌은 여전할 테고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은 역시나 행동은 하지 않고 아무거나 비판만을 일삼으며, 안 하면 죽을 것처럼 SNS이나 두드리고 있겠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만큼 같은 시간이 흐를 뿐인데도 떠받들어지는 새해!
내 인생은 내 것이지요. 변변찮은 아라비아 숫자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졌어요. 당연한 것이지만 주체는 나입니다. 누군가의 생명이 오가는 업무에 가끔 잊고 살 때가 있지요. 마치 한 달 스케줄에 의해 내 인생의 플랜이 어렴풋 결정되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이 꽤나 자주 있단 말이죠. 하지만 그 또한 넓게 보자면 의료인이라는 직업을 결정한 나의 선택 중 일부이며, 그래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숙제 같은 것이지요. 전혀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새해 혹은 새 출발 같은 것이 부담이라면 그것은 강박일 뿐이에요. 아마도 수많은 목표와 계획들은 단지 타이밍을 필요로 할 뿐이고, 그것이 바로 새해라는 타이틀에 꼭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800미터 중거리 달리기를 하는 스피드로 의료평가라는 42.195킬로미터의 마라톤을 멋지게 끝내지 않았습니까. 온 직원이 달려들어 난공불락의 끝판왕을 함께 쳐부순 느낌마저 공유했더랬습니다. 게다가 많은 환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목격합니다. 누군가의 삶에 직접적으로, 그것도 꽤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제 생각엔 그렇게 많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원천적인 자부심인 셈이죠.
진실한 새해 목표가 있다면 멋지게 달려가시길 빕니다. 힘껏 응원합니다. 동시에 원대하게 품고 있던 가슴속에 무언가가 태동하길 바랍니다. 여전히 날은 춥지만 곧 봄이 오고 새싹이 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처럼 한 템포 쉬어가는 겨울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급할 것은 없습니다. 이미 멋진 우리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