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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음식점 곳곳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기다리는 것을 질색하는 친구 덕에 그나마 주문과 계산이 빠른 햄버거 가게에 들어서게 되었다. 얼른 배나 채우고 영화나 보러 가자는 생각에서 출발한 선택이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고깃덩이와 시어 빠진 양상추에 시뻘건 케첩이나 뿌려놓은 빵으로 저녁을 때우긴 싫었지만 다른 여지가 없어 보였다. 역시 계산대의 줄까지 길었지만 어쨌든 먹기로 하였다. 그때 내 앞에는 콧잔등에 이제 슬슬 수염이 돋아나기 시작했지만, 그런 남성성과는 상반되게 바짓단은 마치 스타킹처럼 줄인 남학생 둘, 되지도 않는 아이라인이나 쭉 그리고는 입을 열 때마다 다이어트와 남자 아이돌의 신상명세나 읊으면서, 유리할 때만 어른인 척하는 여학생 둘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유치하다 못해 짜증이 났지만, 재미없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더 넓은 심정으로는 ‘그래, 나도 저랬을 거야, 분명.’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수다였다. 그렇게 오 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그 무리가 주문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생각했던 할인메뉴가 평일 정오 한정이라는 것을 잊은 덕에 예산에 차질이 생겼었나 보다. 원래의 세트메뉴를 포기하고 쇠고기가 들어간 햄버거를 반으로 잘라 달랬다가, 바로 취소하고 조금 더 저렴한 버전의 햄버거 네 개를 선택하더니, 감자튀김을 세 개 주문했다가, 하나는 어니언 링으로 바꾸고 둘은 빅 사이즈로 업그레이드했다가 끝내는 다 취소하고 햄버거 네 개로 통일하는 듯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탄산음료가 리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리고는 탄식의 한숨을 쉬며 각자 하나씩 시켰다가 여자애 둘이 자신들은 하나로 나눠먹겠다며 사이다 한 잔을 주문하더니, 그마저 다시 다이어트 콜라로 바꾸었다. 우왕좌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넷 중 어쩐지 리더로 보이는 여자애가 갑자기 팔짱을 딱 끼고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양파가 들어간 것은 싫다며 짜증을 내었다. 그러자 팔이 유난히 길고 빨간 여드름이 광대뼈에 알알이 박힌 남학생이 그럼 자기가 조금 더 싼 것을 먹겠다며 메뉴를 바꾸고는 그 애의 몫으로는 처음에 주문했던 쇠고기가 들어있는 햄버거에 양파를 빼 달라고 했다(누가 봐도 그 애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는 야심 차게 통신사 카드를 내밀었지만, 그 햄버거 가게는 할인카드가 없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렇게 할인을 거절당한 후 그들은 자리로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그들의 만행을 이렇게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이 글을 읽는 것 역시 숨이 차게 짜증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짜증이 났던 사람은 계산대에 있던, 스물다섯은 훌쩍 넘어 뵈는 직원이었다. 처음 햄버거를 바꿀 때는 ‘너희 같은 애송이들 쯤이야. 이래 봬도 내가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4~5년은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하는 표정으로, 심지어 유쾌하게 그들을 응대하더니, 점점 꼬이는 주문과 함께 그녀의 표정 또한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변덕이 이어질수록 계산대의 각종 키들을 눌러대는 그녀의 손놀림은 마치 피아니스트 같았다. 탁탁탁탁라라락탁탁. 그렇지만 역시 그녀는 프로였기에 자신보다 많게는 10년 정도 차이나는 그들에게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고 “고객님, 고객님”이라 칭하며 무사히 주문을 받아내었으나 위기는 따로 있었다. 마지막 계산까지 끝내고 영수증까지 출력된 그 순간, 얼굴이 살짝 흙빛으로 변하더니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위대하신 고객님을 다시 불러 세웠다. “혹시 현금영수증 하실 건가요?” 중2병에 혹독하게 감염된 듯 주문 내내 한 마디도 않고 무게만 잡던 다른 남학생이 무심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을 하였다. “네.”
다시 주문을 취소하고, 재입력한 후 현금영수증 처리를 하고 난 후의 그녀의 모습은 혹독한 전투를 치른 패잔병 그 자체였다. 낯설지 않았다. 순간 중환자실로 소환된 느낌이었다. 두 페이지가 넘게 갑자기 쏟아진 의사의 오더, 말도 안 되는 보호자의 컴플레인, 지지부진한 사항만을 늘어놓는 환자의 요구가 마치 인터넷 결합상품처럼 안겨진, 딱 그 심정이었다. 엄청나게 공감되는 상황이었다. 지켜보던 나까지도 이렇게 참담해져서 주문을 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내가 이 가게의 관리자였다면 5분만이라도 잠깐 쉬라고 직원 휴게실로 보내고 싶었다.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어렵사리 말을 건네었다. “아, 정말 고생 많으시네요.”
그녀는 난데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었다. 깜짝 놀란 옆자리 직원이 어깨를 다독거리자 이제 소리까지 꺽꺽 내며 대놓고 울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나까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구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대하신 고객님들은 마치 꼽추처럼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지들끼리 웃어젖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