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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잠실나루 역에서 병원까지 걸어가는 출근길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맞이하게 되리라 예상하는 환자들이 조금 나아졌으려나, 혹은 더 좋지 않아 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오늘의 직원식당 메뉴는 무얼까 하는 상상도 하며, 목덜미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에 다시금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었습니다. 까슬한 감촉이 기분 좋은 파란 목도리를 한껏 동여매었지요. 이 겨울, 참 길기도 하네요.
저 앞에 한 가족이 걸어옵니다. 젊은 부부와 그 사이로 아빠의 두둑한 손과 엄마의 따뜻한 손을 하나씩 붙잡은,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로 이루어진 구성원으로 추정되네요. 핑크색 파카를 입고 낭창한 목소리로 뭐가 그리 좋은지 숨도 안 쉬고 깔깔대며 걸어오는 그 모습은, 건조하고 서늘한 주말 오후의 잠실나루 주변에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습니다. 개운하게 겨울잠을 자고 난 귀여운 개구리처럼 생동감이 넘치고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연령대가 몹시 높은 중환자실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어린이의 파워랄까요. 나도 모르게 흐뭇해지더군요(결코 나이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아이는 잔망스러운 입술만 빼고 얼굴 전체를 빨간 목도리로 감싼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목도리로 장난을 친 것이겠지요.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양쪽 손을 부모에게 온전히 맡긴 채로 한 발자국씩 거리낌 없이 내딛으며 그렇게도 웃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아니, 거창하게 가지 맙시다. 필드에서 일을 하며 거칠게 느낄 수 있는 환자와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조건적 혹은 상대적인 기준으로 대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려면 먼저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하고 일을 해야 하겠지요. 저 역시 요즘 그것에 대해 되짚어보는 중이었습니다. 마냥 일만 해치우는 '병원 직원'이 아닌, 플러스알파의 의료진이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그 정점에 서있으니까요. 그것도 거의 삶의 끄트머리에 걸쳐서 말이죠.
기도에 무지막지한 관을 넣어버린 바람에 빨대로 숨을 겨우 쉬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 와중에 숨을 깊고 천천히 쉬라고 종용을 하고,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힘찬 소리와 함께 손발이 묶여버리곤 하죠. 뭐가 어떻게 나아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이끌려 갈 뿐입니다. 마치 암흑 같은 곳에서 주사를 맞고 변을 보고 강제로 잠이 듭니다. 그래요, 중환자실은 극단적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살아야 한다며 이런저런 굵은 관을 또 삽입하고, 남의 피를 집어넣기도 합니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상황들을 그야말로 날것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느낌일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친절하고 싶은데, 웃으며 일하고 싶은데, 정말 나아지게 하고 싶은데 환자는 우리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관계는 당최 어떤 것이었을지 커다란 물음표가 머리 위에 떠다닙니다. 퇴근 후 그로기 상태가 되는 것은 비단 업무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딸기 사탕처럼 웃던 그 여자아이를 떠올려 봅니다. 양쪽으로 믿음직스럽게 부여잡은 두 손에 모든 것을 기꺼이 맡긴 채, 심지어 행복해 보이던 그 신뢰의 가족을 생각해봅니다. 분명 모든 짐을 나눠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줄기의 빛도 없는 깜깜한 동굴처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치료과정에 있어 반딧불 같은 존재라도 되고 싶다면 그것은 욕심일까요. 이쪽으로 오면 된다고, 안심하고 제 손을 잡고 한 발자국, 아니, 반 발자국이라도 디디면 그것이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있는 큰 움직임이라고 마음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첫걸음마를 떼던 순간, 뒤편에서 언제 넘어져도 안전하게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던 누군가가 되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했던, 지금은 반쯤은 포기한 그런 관계가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