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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제였습니다. 모처럼 데이 근무가 칼 같이 끝난 터라 가뿐하게 운동을 마치고 예전 대학 동기와의 술 약속을 향해 룰루랄라 병원을 나서고 있었답니다. 그때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저께 밤부터 아침까지 큰 비가 왔었던 터라 지나가는 비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런, 하늘이 딱 병원 위로만 시꺼먼 겁니다. 징조가 심상치 않아 더욱더 발걸음에 가속도를 붙였죠.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라 말끔한 옷차림이 망가질까 더 서둘렀답니다. 하지만 새로 산 검은색 로퍼는 자꾸 발뒤꿈치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바짓단은 자꾸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 목표는 잠실나루 역에 도착해서 바짓단을 곱게 한 단 더 접고 발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 전철을 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파우치 속에 저번에 쓰고 남은 것이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드디어 아산대교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무슨 스위치 마냥 다리에 올라서자마자 헬스장 샤워기처럼 비가 때려붓지 뭡니까. 게다가 다리 위는 평소에도 바람이 만만치 않은데 하필 그 시점엔 돌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내려치는 소나기 한복판에 제 어깨만 간신히 가리는 3단 자동우산을 힘겹게 펼쳤습니다. 젖어가는 옷이야 말리면 그만이지만 공들여 왁스칠을 한 머리는 망가지면 수습이 곤란하기에 온 신경은 두부로 향한 채 사투를 벌이며 걸어갔습니다. 중간쯤 도달했는데도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바지의 오른쪽은 이미 다 젖어 분명 회색이었던 것이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밑단에서 빗물이 촉촉이 흘려 로퍼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상의 오른편도 젖어가고 있었는데, 아뿔싸! 하필 오른손에 루 뭐, 암튼 비싼 가방을 딱 들고 있어서 그것이 그만 빗물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젖어가는 몸뚱이, 고여가는 로퍼 안의 빗물, 그토록 사수했건만 파뿌리처럼 망가져가는 머리까지 기어코 짜증을 폭발하게 만들더군요.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술술 나오고 있었습니다(평소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타입은 아니고 PRN정도로만 쓰곤 합니다). 차마 지면상에서는 옮기지 못하는 두세 마디의 욕을 본능으로 내뱉고 다시 하늘을 보니 잠실 쪽은 아주 맑은 것이 아니겠어요. 분노가 배가되었습니다. 한 번 더 욕이 나오더군요. 그때 마주 오던 행인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이놈의 주둥아리는 타이밍도 참 별로예요. 마주치기 전에 단어가 튀어나왔다면 안 한 척이라도 할 텐데, 눈을 마주치고 그 행인의 존재를 뇌에서 인식하고는 애매한 기억을 뒤져 누구인지 알아냄과 동시에 경멸스러운 언어가 방언하듯 쏟아져 나왔지 뭐예요. 그 행인은 바로 중홤자실에서 장기환자로 계시다가 다행히 병동으로 올라간 환자의 보호자였습니다. 겉으로는 시니컬하지만 간호사의 심정을 그래도 잘 헤아려 주면서 알고 보면 속정 깊은 보호자로 기억되던 분입니다. 가끔 병원 내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를 꾸뻑하던 사이었기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
억양이 이상했습니다. 멀리서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준비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당황하셨겠지요. 그래서 그런 억양을 구사하셨던 모양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욕을 하고 그분은 인사를 하셨습니다. 중환자실의 초록색 특수복이 발가벗져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민낯을 들킨 새신부의 심정일까요.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방귀를 뀌었을 때의 느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 거짓말처럼 거센 바람이 멎고 비가 뚝 그쳤습니다. 사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인사와 욕이 난무하던 아산대교 중간지점, 이렇게 적막한 곳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