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에 담긴 할머니의 흔적을 기리며…
“오늘 새벽 1시 17분에 돌아가셨다.”
10월 12일 수요일 아침 8시경. 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한 교육생이 탑승할 버스를 놓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아침 이른 시간에 찍히는 아버지의 전화가 생경했고,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께서 병세가 호전 중이라는 소식에 안심한 것도 잠시, 또다시 폐렴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걸려온 전화벨 소리는 찰나지만 할머니의 부재를 예감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짧았으며, 언제 오느냐는 용건만 남기고 끊었다. 곧이어 엄마는 문자로 할머니의 사망진단서를 보내왔다.
부고를 알리고 경조휴가를 내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두 눈에 담았다. 눈부시게 파랗고, 도로 위 반사된 햇살은 윤슬처럼 빛났다. “한순두 할무이요, 잘 가이소. 사랑하요!” 주억거린 고개만큼, 한 줌의 굵은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렀다.
팀장님께 할머니의 부고를 전하고, 간단히 행정처리를 한 후 집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도 결석계를 제출하고,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택에서 삼천포까지 약 4시간 정도 운전해 삼천포 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장례식장을 향하는 중간중간 아내와 할머니를 추억하는 단상을 읊조리며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아들도 올해 1월 설 연휴에 요양원에서 만난 증조할머니와 손을 꽉 잡았던 따뜻한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 치매로 힘든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었지만, 증손자의 손을 매만지며 연신 “고맙데이, 와줘서 참말로 고맙데이”라며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던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오후 4시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부모님을 비롯해 삼촌, 숙모, 고모와 고모부께서 자리하고 계셨다. 나와 아내도 상복으로 환복한 후, 문상객을 맞았다. 사촌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부지런히 음식을 내다 날랐다. 입구 양옆으로 나란히 줄지은 화환들은 할머니의 자식과 손주들의 생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상징이었다. 나 역시 대표이사와 우리사주조합장 명의의 화환 2개가 그 틈 속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곱디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 영정사진을 보면서, 나는 6살부터 중학교까지 할머니 손에 자란 기억들이 하나둘 소환되기 시작했다. 파마머리 한 번 없이 늘 긴 생머리와 옥비늘을 고집하셨고, 돼지고기는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말문만 트이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구수한 입담은 둘째 가라 서럽고, 악바구니에 받쳐 화가 가득하면 여느 음식점 욕쟁이 할머니만큼의 구수한 욕지기 시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41년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8남매를 오롯이 키운 할머니. 150cm에도 못 미치는 단신이지만, 카랑카랑 울리는 목소리는 대장군만큼 기개가 차고 넘쳤다.
장례 이틀째는 입관식이 진행됐다. 할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목관 안에 반듯이 누워 삼베 수의를 입은 할머니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 삼촌, 숙모, 고모, 고모부 등 장례사의 선창에 맞춰 곡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은 또 언제 그렇게 잉태했는지, 그렁그렁한 눈물방울과 함께 갈라진 울음소리 사이로 할머니를 배웅하는 마지막 모습이 실로 가슴 아팠다. 저마다 노잣돈을 넣으며 “잘 가시라”는 마지막 인사. 할머니께서 부디 사후세계로 잘 건너가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었다.
마지막 3일 차는 발인식. 장손인 나는 할머니 영정사진과 혼백을 들고 사촌동생의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화장이 진행될 곳은 경남고성 공설화장장. 가는 중간에 할머니께서 평생을 함께한 고향집에 들렀다. 당신께서 90년 가까이 머무른 안방과 집 옆에 위치한 텃밭 그리고 뒷산을 두루두루 보시도록 했다. 동네 할머니 두 분은 액자에 담긴 할머니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고, 나도 목울대를 삼켰다. 화장장까지는 30분가량 소요됐다. 목관은 화마로 곧 뒤덮였고, 한 시간 가까이 그 과정이 계속됐다. 유골이 수습돼 곧장 함에 담겼다. 진짜 한 줌의 가루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할머니와의 추억이 거의 없음에도, 집에 돌아온 첫날 저녁에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깜짝 놀랐다. 아내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나는 증조할머니께서 항상 보고 있을 테니 건강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며 아이를 달랬다. 아들에게 어떤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자리하는지 모른다. 다만 따뜻한 손의 감촉을 기억하며 할머니를 향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며, 그 흔적으로 왈칵 눈물을 쏟았다는 데 대해 마음에 전율이 일었다.
죽어서도 인연이란 게 있는지 모르지만, 41년 전부터 동네 야산에 잠들어 계시는 할아버지는 6.25 참전용사로 인정돼 이달 말 산청 호국원으로 이장될 예정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가고 싶었는지, 두 분이 그곳에 영원히 잠드실 예정이다. 장례식에도 이런 내막을 들은 친인척과 문상객들은 하나같이 신기해했다. “참말로 부부가 함께 갈 운명이었던 것 같소!”
할머니의 입관과 화장장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모습으로 다가온다. 100년이란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딘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더더욱 열심히, 더더욱 건강하게 , 더더욱 사랑하며 살겠다는 ‘아이러니’를 다짐한다. 훗날 나 역시 입관을 거쳐 화장의 운명이기에, 그 마지막 모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깊숙이 자리할 것이다. 때문에 단디 살자고, 그리고 후회 없이 떠나자고. 그래서 할머니를 다시 뵐 때면, 당신의 장손 한 세상 잘 살다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