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수레바퀴에서 길을 찾다
'변화'는 기존의 관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자아를 이식하는 행위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디폴트 값 대신 이전과는 차별화된 자신과 마주하기를 기대한다. 그 발화점은 오늘의 내가 못 미덥고, 내일의 내가 비루하다는 '확신' 때문이다. 과거와의 단절도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변화'는 인생의 단면을 입체적으로 승화시킨다. 다만 타의와 환경에 의한 '속수무책형 변화'인지, 아니면 스스로 주도해서 만든 '자기 주도적 변화'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자라면 내가 감응하지 않은 상황에서 '변화'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수용의 폭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서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후자는 절실함이 강제된다. 의지가 반영된 만큼, 오래갈 수 있는 내 안의 에너자이저가 펌핑질을 하는 셈이다.
조직의 '변화'는 회사 생활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마주하는 단골 메뉴다. 하지만 경영층의 바람과는 달리 굼뜨고 무거운 조직 특유의 관성이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한, 지나가는 유행처럼 흘러갈 때가 대부분이다. 그때뿐이라며, 귀신같이 과거로 회귀하는 본능을 보인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기존의 것이 좋다며 자화자찬이 이뤄지고, '라떼 만세'의 건배 삼창을 외친다. 그 속에서 세대 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요단강을 건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변화'는 그만큼 합리화와 변명이라는 강적을 꺾어야 하기에 상처뿐인 생채기만 남길 때가 많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인 마셜 골드스미스는 <트리거>에서 '변화의 수레바퀴'를 소개한 바 있다. 그가 제시하는 '변화'의 네 가지 축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창조(Creation)다. '변화'를 위해선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거(Elimination)다. 해오던 것 중 부정적인 요소를 없애는 일이다. 셋째는 보존(Preservation)이다. 앞으로 계속 유지해가고 싶은 일이다. 마지막은 수용(Acceptance)이다.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연초에는 누구나 자신만의 계획을 짜고 액션플랜을 만든다. 계획의 기저에는 대부분 '변화'를 일 순위로 꼽고, 다소 실현 불가능한 무모한 계획들을 담기도 한다. 여기에 다양한 툴이 등장하는 데, 만다라트를 주로 사용해온 나는 CEPA(Creation, Elimination, Preservance, Acceptance)를 마인드맵에 추가했다.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변화'의 요소들을 파악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통해 선순환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을 토대로 CEPA에 대해 나름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해보고자 한다.
우선 '창조'(Creation)는 무엇일까? 새로운 시작점이다. '변화'의 임팩트가 가장 크다.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는 트리거가 될지 모른다. 다만 주저할 수 있다. ‘과연’, '설마'라는 의문 부사가 '변화'를 저울질하는 찰나에 맞춰 시도 때도 없이 밀착마크한다. ‘내가 뭐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매조 짓는다. ‘그래, 다음 기회에...’ 시도조차 못하고 '꽝'을 연발한다. 적어도 창조를 위해서는 '행동'이 '생각'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변화'가 대단한 결심이기보다 이처럼 '하느냐 마느냐'의 행동에서 판가름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역시 주저흔이 박혀 호기를 놓친 경우가 많았다. 땅을 치고 후회한들 떠난 버스가 돌아오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제거'(Elimination)는 '없앤다'는 것이다. 박제된 꼬리표를 없애다 보니 고통이 따른다. 나쁜 습관을 떠올리면 된다. 성장의 훼방꾼인 이런 잔가지만 모아도 가지치기할 것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하지만 사람은 '변화'를 싫어한다. 단절의 용기가 필요하지만, 자신과 타협점을 찾으려 들 것이다. 예컨대,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담배 끊기가 죽도록 힘든 것이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제거'는 변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자기 절제와 희생의 보상은 달콤한 법이다. 나 같은 경우 담배를 끊은 후 건강은 물론 퀴퀴한 냄새가 사라지며 결혼이란 제도 속으로 수월하게 골인했다.
'보존'(Preservance)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영역 중 하나다. 삶의 본질이자 뼈대가 되는 부분이다. 아무런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존'은 기존의 뭉툭함을 뾰족하게 만드는 행위다. 한층 상향된 목표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거룩한 과정이다. 평범이 비범으로 빛을 발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짠내나던 애잔함이 부러움으로 탈바꿈된다. 개인의 정체성이 구체화된다. 이들은 예리한 무기가 되어 내 삶의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한다. 가령 좋은 습관(운동, 독서, 글쓰기, 영어공부 등)을 내 삶에 영입한 후, '활성화'되는 과정이 바로 이 '보존' 영역인 셈이다. 작은 씨앗이 튼실한 열매를 맺는 과정과도 같다. '변화'를 숙성시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마지막으로 '수용'(Acceptance)은 체념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다. 현실을 거부하는 용렬함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는 상남자의 아량이다. 우리 주위에는 끝자락을 붙들고 미련을 부여잡지만 결국 후회와 아쉬움만 곱씹는 경우가 숱하다. 영어 속담에 "It’s water under the bridge."라는 말이 있다. 흐르는 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이 다 지나간 일이라는 의미다. '수용'은 관용적인 삶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비겁하거나 배타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둘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수용'이 마치 비겁자인 것처럼 호도되어 마타도어식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질함이 아니라, 담대한 변화의 서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변화'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처음으로 유턴하는 이유는 절실함에 따른 '의지 부족'에 있다. 그런 점에서 'CEPA'는 자신을 면밀하게 돌아보고, 강점과 약점을 객관화하는 메타인지의 지표가 된다. 특히 개인의 신념, 주위 환경, 인간관계 등을 조건으로, 스스로 CEPA를 설계하고 얼개를 짤 때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일단 '변화'의 꺼리들을 모으고 분류해 CEPA의 룰에 따라 계획을 체계화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올해는 누구보다 자기 의지를 확신하며 '변화'가 넘실대는 시간으로 가득했으면 한다. 디폴트 값을 갱신하는 재미가 쏠쏠하게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