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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Jan 16. 2021

이제야 그녀는 ‘진짜 바다’를 품습니다

자유를 향한 그녀의 인생을 응원하며...

"응,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된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두 옥타브는 낮았다. 갈라지고 거칠어진 소리의 질감만이 그녀의 몸 상태가 어떠한지 짐작케 했다. 평소라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이날은 일분도 안 돼 신호음이 끊겼다. 적막을 깨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북받쳤던 감정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2021년 1월 13일 오전 8시 35분. 그녀가 수술대에 올랐다. 척추협착증으로 몇 년을 끌어오다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탓이다. 여태까지 고통이 온몸을 휘감을 때마다 침으로 달랬고, 물리치료와 근육 주사로 아픔을 삼켰다. 지난여름에는 큰 손자와 공원 산책을 나섰다 식겁했던 적이 있었다. 시큼하게 올라오는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혈기왕성한 5살 사내아이를 쫓아다니려고 했으니 사달이 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올해 나이는 66살이다. 나이만 따지면 노인 축에도 못 들지만, 몸만 떼어놓고 보면 결리고 아프고 쑤신 곳 천지다. 특히 허리와 무릎은 고질병 중 하나다. 억척스럽게 집안일을 해내는 그녀를 보며 식구들은 그녀의 고통에 무감했다. 그런 어느 날 걸음조차 떼기 힘들어지자 그녀도 백기를 들었다. 평소 들어놨던 생명보험의 실손보험과 수술보장비의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치러야 할 셈까지 끝내버렸다. 수술비 약 10% 정도만 생돈이 들어간다는 안도에 즉각 실행에 옮겼다. MRI를 찍고 의사 소견을 들은 후 수술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지난해에는 녹내장 수술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불청객이라지만, 손자 얼굴이 흐릿해지자 안과에 직접 의뢰해 수술을 감행했다. 그 이튿날 선글라스를 끼고 시어머니 밭에서 고추를 따며 배시시 웃던 그녀다. 5년 전에는 15년 동안 해오던 틀니를 버리고 2년 넘게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다. 지금 그녀는 고장 난 부위를 하나씩 고쳐가는 중이다. 젊었을 적 '방치'됐던 몸을 부지런히 매만지고 있다. '방치'라는 말, 그 '필연'을 떠올리면 이야기는 길어진다. 




20살에 결혼한 그녀는 바다에서 거의 한 평생을 보냈다. 부부는 오랜 기간 남의 집 어장에서 일을 배우며 더부살이를 했다. 그리고 틈틈이 멸치 어장을 준비하며 은행 융자를 받아 독립했다. 그 이후 둘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멸치와 사투를 벌였다. 남편은 그물을 당겼고, 그녀는 멸치를 삶았다. 100도가 넘는 염수 탓에 그녀의 양팔에는 화상 자국이 주홍글씨처럼 박제됐다. 거칠고 투박한 일꾼들의 밥상도 그녀 차지였다. 사람 수에 맞춰 삼시 세끼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감당했다. 끼니때마다 일꾼들의 걸쭉한 욕지기를 농으로 받아넘겨야 했다. 1.5톤 트럭을 타고 새벽 경매장을 종횡무진하기도 했다. 1인 3역을 거뜬히 해낸 그녀였다. 바다가 그녀를 기센 여장부로 키웠다.


그녀의 자식은 셋이었다. 한 동네에 사는 시어머니가 돌봤다. 여느 자식처럼 양육과 보육은 사치였다. 먹고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바다는 보물창고였다. 버티다 보니 삶에 볕이 들기 시작했다. 빚을 갚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얼기설기 지은 벽돌집을 허물고, 튼튼한 2층 집을 지었다. 선창가에서 작업장까지 리어카로 실어 나르던 멸치는 어느덧 트럭이 대신했다. 아들 둘과 딸은 큰 도시로 나갔다. 그녀는 이만하면 잘 살았노라고 생각했다.     


해풍으로 치장한 그녀의 몸에서는 늘 바다내음이 났다. 소금기 머금은 짠내가 진동했다. 그녀의 옷은 장신구 대신 생선 비늘이 가득했다. 남루한 그녀를 보며 화딱지가 났었다. 멸치 반찬이 싫었고, 생굴과 회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 냄새가,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다. 철이 들어서야 알았다. 부족함 없이 받은 용돈과 학비 모두 내가 하찮게 여겼던 바다에서 굴비처럼 엮어 나왔음을... 먹고 사느라 그녀는 몸을 돌보지 않았다. 허리는 점점 구부정하게 변했고, 눈은 하루가 다르게 침침해졌다. 이는 틀니로 버텼다.


그녀도 몸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녀는 6년 전 바다를 졸업했다. 식구들은 애잔한 마음을 담아 감사패를 전달했다. 긴 노동에서 벗어난 안도감으로 속이 후련할 줄 알았다. 그러나 비애와 상실이 더 큰 것 같았다. 은퇴 후 도시생활이 적적할 때면 바다에 있을 때가 자유로웠노라고 말한다.   




수술 후 줄곧 그녀의 남편이 병상을 지킨다. 전형적인 경상도 스타일인 그도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순한 양까지는 아니어도,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시중을 든다. 투덜거리기도 하고, 마땅찮은 트집을 잡기도 한다.   


"의사 말로는 수술은 잘 끝났단다. 내일부터 물리치료받고 조금씩 걷는 연습 하라고 하더라. 여기는 걱정 말고 네 일이나 잘해라."


바다에 혹사당한 여린 몸을 이제야 하나 둘 복원 중인 그녀다. 이제는 건강한 몸으로 편안한 날이 찾아왔으면 싶다. 그래서 바다가 품지 못한 자유를 만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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