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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Feb 13. 2021

아내가 염색하는 시간

부부가 합일되는 순간

2년 전부터 내 머리는 아내가 염색한다. 미용실에 드는 돈을 아끼려는 목적이 있지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골고루 섞인 염색약이 내 머리에 닿을 때면, 지긋이 눈을 감는다. 내 머리를 향한 아내의 시선과 바닥을 향한 나의 시선이 어긋나도, 입으로 오가는 정담은 꽤나 다정하고 부드럽다. 마치 라디오를 듣는 레트로 감성처럼 청각만으로 부부의 대화는 즐거움을 더한다.


부부 이야기의 8할은 주로 아이다. 온종일 육아를 도맡다 보니,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아이 이야기가 빈틈없이 들어찬다. 나는 추임새로 "어 그래?" "맞아" "그렇구나" "설마" 정도로 맞장구를 치며 아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러다 문득 딴생각을 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면, 아내는 금세 새초롬해진다. 순간 미안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갈 때쯤, 염색약의 침공은 갑자기 강렬해진다. "뭐하는데, 내가 하는 말 못 들었나?"


그럼에도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 물론 식탁에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은 있지만, 온전히 남편 머리를 매만지며 오가는 이야기에는 '공'(空)이 없다. 나의 등에 쏟아지는 아내의 숨결이, 허공을 휘감는 말의 조각이, 분주하게 오가는 아내의 빗질과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는 합일된다. 아이는 부부의 공간을 빌려주며(?), 멀찍이 떨어져 장난감과 합일한다. 나는 눈을 감고 이 '평온한 시간'에 감사하고, 그 느낌을 만끽한다. 때론 지나가는 이 찰나가 아쉬워, 늘어나는 흰머리를 애써 기다리기도 한다.  


한참 현실과 몽상의 경계쯤에 헤매일 때, 아내의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다. "다 끝났어. 20분쯤 있다가 깨끗하게 씻어. 약이 독하니까 아이 근처에 가지 말고. 그리고 머리 감을 때 비닐장갑 꼭 끼고..."


아이가 비껴준 짧은 시간이지만, 아내가 염색하는 시간이 고맙고, 기꺼운 마음으로 노동의 일방을 제공한 아내의 배려에 감사하다. 소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점층되는 의미를 더하면서 부부의 연도 한층 깊어지리라. 뭔가 크고 대단한 이벤트보다, 때론 작은 것들이 훨씬 깊은 울림과 행복을 만든다. 나도 요즘 부쩍 아픔을 호소하는 아내의 어깨를 틈날 때마다 주물럭거린다. “필요하면 말만 해. 어깨 뭉치거나 결리면 시원하게 안마해줄게.” “엥, 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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