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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Feb 09. 2021

'세상의 길'을 내는 사람들

강자의 위선과 약자의 위약을 가려내는 일들 

정말 세계가 중병에 걸려 신음 중인 걸까. 올해는 예년과 달리 유독 눈 구경을 자주 한다. 그날도 전날 밤 내린 함박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보는 건 즐겁지만, 이 즐거운 사치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새벽 5시 무렵,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침묵을 깨고 아파트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퍼퍼퍽~ 퍼퍼퍽~" 

"푸우욱~ 푸우욱~"

새벽부터 수북이 쌓인 함박눈을 치우며 길을 내는 경비 아저씨들 


아파트 인도(人道)에 수북이 쌓인 눈 뭉치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초로의 경비 아저씨 두 분이 새벽부터 삽질을 하는 광경이 들어왔다. 순간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아파트 커뮤니티 카페에 올릴까 생각했다. 이전투구처럼 삿대질과 갑질을 일삼는 일부 몰상식한 주민들에게 보여주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런 뭉클한 사진을 보더라도 그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감흥에 젖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아파트 경비라면 당연히 해야 할 기본 업무라며, '폄훼'와 '무시'로 일관할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일갈해주고 싶었다. '이 분들 덕분에 출근길이 가뿐해지고, 당신의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직업을 의무로만 따지지 말고, 그 속에 담긴 '너머의 마음'을 보라고. 한 동안 창밖을 응시하다, 이내 훈훈하게 데워진 마음을 꺼내봤다.        




사원 시절에 회사에서 가끔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마감 때문에 쫓기다 보니 하릴없이 일과 사투를 벌이던 리즈 시절이었다. 가끔 후배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는 추억(?) 돋는 시간이었지만, 애써 기억에서 지운다. 꼰대 선배로 남기 싫다는 일종의 자기 주문이다. 그 당시 새벽 4시가 되면 사무실에 들어오는 여성 한 분이 계셨다. 화들짝 놀라면서, 서로 머쓱했던 사이. 바로 청소하는 아주머니였다. 


빗자루를 들고 여기저기 바닥을 쓸고, 일일이 쓰레기통을 비우는 모습에 마음이 짠하면서 미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충성하겠다는 신조보다 스스로 책잡히기 싫은 자존심 때문에 밤을 기꺼이 받쳤던 나도 나였지만, 이른 새벽부터 생계를 위해 나온 아주머니에게도 측은지심이 들었다. 지금은 밤새워 일하는 나도, 이른 새벽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없지만, 뒤돌아 생각하면 참 고맙고 감사한 순간이었다.    




세상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들의 경우 사회가 우르르 몰려가 그들을 떠받친다. 물론 이들 덕분에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고 발전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그 대척점에 서서 무시와 괄시 속에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들 역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약자의 위약은 잘 보이지만, 강자의 위선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물론 이리저리 부딪치는 불협화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종종 음지에서 노동의 가치를 길어 올리는 분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바로 내 옆에 함께 호흡하며 사는 이웃임에도, 그분들의 노동을 당연히 생각하고, 그 노동의 수고를 우습게 여기는 천민자본주의의 민낯들 말이다. 


경비 아저씨, 청소 아줌마, 택배 아저씨, 환경 미화원 등 직업의 귀천을 따지고, 차별을 당연시한다. 물론 예전보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막이 강해지고 사람들의 인식도 한결 성숙해졌지만, 그 괴리의 온도차는 예나 지금이나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 분들이 없다면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리 없는 데도 우리는 여전히 미어캣처럼 빳빳이 고개를 들며 아래로 향할 줄 모른다




결국 해답은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서로를 배려하는 존중의 문화가 숙성되어 들불처럼 확산되어야 한다. 적어도 OECD 경제대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선 외형에 기댄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성숙도가 무르익어야 한다. 올바르고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추종하는 '시민의식'이 바로 여기에 부합한다. 그리고 교묘하게 감춰진 '강자의 위선'이란 베일을 걷어내는 일 역시, 오늘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숙명이다. 적어도 '시민'이란 타이틀을 달았다면 말이다.      


새벽녘 눈을 치우며 천천히 길을 만드는 두 분의 경비 아저씨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른거린다. 잔상은 제법 오래갈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천한 인식'을 준엄하게 꾸짖는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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