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결혼 생활은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이혼하니 불행한 게 아니라, 불행하니까 이혼하는 거야."
얼마 전에 본 [애비규환]이란 영화에서 엄마(장혜진)와 딸(정수정)이 나눈 대사다. 레토릭이 느껴지지만, '이혼'을 결심하는 명징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이미 법적으로 남남이 됐거나, 갈라서기를 고심하는 부부들에게 '이혼'은 지독한(?) 현실이다.
최근 모 케이블 TV에는 급기야 "우리 이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이혼한 연예인이나 셀럽 부부가 다시 만나, 이혼 후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후회로 얼룩진 서로의 마음을 더듬으며 과거와 현재의 지점을 돌아본다는 취지인데, 예전 같으면 '금기'라고 여겼을 아이템이 인기를 끄는 데 새삼 세상이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다만 이혼으로 가는 과정이 녹록지 않다. 설사 부부가 이혼을 결정하더라도 가정법원은 '이혼숙려기간'을 둠으로써 번복의 기회를 법으로 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혼 의사가 확실하다면, 법원으로부터 이혼 의사가 합치함을 공식적으로 확인 받음으로써 이혼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느닷없이 '이혼'이라는 주제를 꺼내 들었다. '이혼'은 나와 별개라고 여기지만 한발 짝 물러나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이혼'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인지, 그리고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한 '행복추구권'은 무엇인지. 이혼을 터부시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이혼 부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다 보니 인식도 예전과는 확연하게 바뀌었다. 특히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이혼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산다는 '졸혼'이란 스핀오프까지 생겨나, 급격히 바뀌는 신풍속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혼'을 결정한다는 것이 그 과정은 차치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영화 대사처럼 "불행하니 이혼한다"는 단순한 등치 성립이 모호하다. 아이 양육, 양가 부모, 재산 분할 등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그냥저냥 살아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냥 참고 산다'는 부조리를 통해 '불행 추구권'을 온몸으로 떠안는 경우다. 그리고 또 악순환이 이어진다.
결국 결혼은 부부간 마음가짐부터 달리해야 한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탓'만 하기 시작하면, '사랑'의 감정은 어느덧 싸늘한 냉골로 바뀔 것이다. 마음공부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혼'이란 제도를 훌륭하게 이어갈 수 없다.
TV에서 '잉꼬부부'나 '천생연분'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개인적으로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과 감춰지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고유명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일방의 희생과 배려가 강제됐음을 의미한다. 아니면 양측의 부단한 이해와 공감의 노력의 결과일지도. 앞서 말했지만 무서운 건 '체념'이다. 그냥 포기하고 삶의 주도권이 빼앗겨 살아지는 것. 그것은 결국 이혼으로 가는 발화점이 된다. 그래서 싸우면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해가 이해로 바뀌지 않는 한, 물과 기름처럼 부부의 이질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무릇 행복한 가정은 비슷해도 불행한 가정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혼은 분명 후자다. 당사자는 물론 아이들의 심리에도 큰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만큼 미치는 파장이 크다. 때문에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를 봐서라도 참으라"는 말로 훈수를 두면서, 어느 일방의 희생을 당연시한다. 따지고 보면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충돌하는 폭력의 잔재임에도, 그 상흔의 깊이를 헤아리지 않은 채 서슴없이 말 폭탄을 쏟아낸다.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혼에 관한 단상은 지금의 결혼 생활을 잘하기 위한 다짐의 글이다. '메멘토 모리'처럼 죽음을 멀리하지 않는 이유가 생의 순간에 천착하며 더 감사하고 더 잘 살기 위함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