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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Jun 16. 2021

16년 만의 면접

무력감만 벌컥벌컥 들이키며

"본인이 기획부터 아웃풋에 이르기까지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업적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문득 한기가 찾아들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빤히 보다 잠시 딴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들릴락 말락 한숨이 새어 나왔다.


“… 지난 16년 동안 사원부터 차장까지 다양한 직급을 경험하면서… 기억에 남는 건… 2013년 청문회 자료를 준비했던 것이 아무래도… 가장 큰 업적인 것 같습니다.”


40대 후반의 면접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의도했던 대답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자,  ‘망했다’는 자조와 함께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하얗다는 느낌을 실로 오랜만에 받았다. 목소리는 하이톤의 궤도에서 벗어났고, 시선은 이리저리 갈지자를 그렸으며, 마음은 딴 데로 향했다.    


45살에 면접을 본다는 것. 면접 제의를 받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나는 한 직장에서 16년을 근무하다, 뒤늦게 이직시장에 노크한 늦깎이 이직 지망생이다. 그리고 우연히 한 곳에서 면접 제의를 해서, 1차 전화면접에 이어 2차 화상 실무면접을 봤다.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전화면접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화상면접에선 그야말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극과 극으로 치닫는 면접 분위기의 이질감 속에 나 역시 감정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그 지난한 시간을 지금에서야 복기하는 중이다.  


사실 면접은 비교적 평이했고, 극도의 압박 면접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질문 앞에서 이리저리 동공을 굴리며 횡설수설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마치 타인처럼 낯설었다. 특히 나이가 나이인만큼 주어진 포지션인 매니저로서의 리더십에 대해 물었을 때, 현 직장의 경험을 최대한 버무려 답변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지금 다니는 곳은 제조업이고, 지원한 곳은 외국계 회사와 비슷한 기업문화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엇나가는 답변을 하다 보니, 면접관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솔직히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렵게 면접 시간을 잡은 그곳 사정을 감안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면접을 끝마쳤다.    


"여기는 임원으로 있는 외국인이 갑이에요. 저도 작년에 제조업에서 이곳으로 이직해서 왔는데, 아직도 적응하기가 힘들어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


면접관인 그가 건넨 마지막 말. 곱씹어봤다. 영혼 없는 멘트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이 역시 실무면접 매뉴얼이 아닐까 하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한 나 자신만 덩그러니 남았다.    




상기된 얼굴로 화상면접을 마치자마자, 거실로 나가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탁 위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아내를 의식해 툭 말을 던졌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붙는다 해도 아마 안 갈 거야. 그곳 기업문화가 나랑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적응하기도 힘들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편하게 생각해.”


시니컬하면서도 간단명료한 아내의 말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20대, 30대 직원들의 퇴사 러시가 이어지고 있고, 나 또한 불투명한 미래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무언의 압박감에 이곳저곳 이력서를 냈던 것이다. 세 곳 중 다행히 한 군데에서 면접 기회를 줬는데, 이렇게 죽을 쑤고 말았다. 40대 중반 ‘면접’ 이란 흔치 않은 인생 이벤트(?)를 겪으며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은퇴 시기를 규정할 수 없지만, 공무원이 아닐 바에야 정년은 불가능하다. 숱한 구조조정과 꼰대의 멸시 그리고 자유의 열망을 담아 개인적으로 50대 중반을 직장의 끝물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 10년이 남았고, 그 기간 동안은 근로소득을 통해 생계를 이어야 한다. 외벌이로서 주어진 선택권은 없다. 고정 수입에 타격을 받으며 소득이 단절된다면 우리 가족에게는 직격탄이다. 간간히 대학 친구들 중 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축하 메시지를 담아 화환을 보내며 그들의 건승을 진심으로 건넸다. 먹고사는 것이 이렇게 단내나고 고단할 줄은 몰랐다. 40대만큼 어중간한 나이가 없다. 왠지 억울하다. 옮기려고 해도 출중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나이에 프리미엄까지 붙어 쉽지 않다. 그렇다고 바닥으로 급전직하 중인 지금 직장에서 희망을 갖다 붙이기엔 씁쓸함이 밀려온다.


그래도 ‘면접’ 그 자체에 감사하다. 어디서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16년 만에 본 첫 면접이라(그것도 익숙지 않는 스카이프 화상면접으로...), 준비도 소홀했다. 일단 감정의 파고를 추스른 후, 새로운 기회 탐색에 나설 것이다.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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