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떼파파 Jun 30. 2021

두 죽음을 지켜보며

해경 함장과 분당 고3의 죽음을 애도하며

포털사이트에 '죽음'을 다룬 기사는 범인(凡人)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히 그 죽음의 대상이 유명인이라면, 여러 겹의 감정이 투사돼 자신을 휘젓는다. 그 유명한 베르테르 효과가 대표적이다.


최근 유명인은 아니지만, 두 죽음이 상념에서 잊히질 않는다. 연이은 속보성 보도에 따른 화제성도 있지만, '죽음'으로 상징하는 사회의 민낯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이뤄진 경우라면, 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가족이나 친구 등 오롯이 남겨진 자의 몫으로 할당당하는 슬픔은 어떻게 용인될 수 있을까. 




첫 번째 죽음은 해경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연이다. 아들의 군 복무를 위해 자신의 함정에 승선시켰다는 이유다. 이 사실을 폭로한 육대전(육군 훈련소 대시 전해드립니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알 권리를 위한 불가피한 경우였다고 설명했다. 포털사이트의 댓글은 양단으로 나뉘어 죽음을 둘러싼 여러 억측이 난무했다. 언론은 경마식 저널리즘에 길들여져 오직 조회수 폭주를 위해 선정적이고 무책임적인 단어와 문장을 갖다 붙였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직접적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두 번째 죽음은 실종 7일 만에 분당 야산에서 발견된 고3 김휘성 학생의 죽음이다. 타살을 의심할 만한 외상도,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전날 부모로부터 심한 꾸짖음을 받았다는 정황이 설득력을 얻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자살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제발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랐던 부모와 친구들의 간절함이 무색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니, 죽음으로 가는 뒤안길이 얼마나 황량했을 지 마음이 아프다. 실종 사고 직후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던 경찰들의 노력도 빛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공통분모를 가질 수 없다. 개별적이다. 하나하나의 사연이 엇비슷할 수 있지만, 등가의 형식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 애당초 불가능하다. 특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주위의 추측만 무성할 뿐, 철저히 주관적이다. 행여 유언장을 발견하더라도 텍스트로 분한 죽음의 이유와, 죽음을 목전에 둔 당사자의 감정은 절대 합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번 죽음을 지켜보면 왜 그리도 씁쓸하고 착잡한지 며칠이 지나도 마음의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죽음의 당사자보다, 남겨진 자를 향한 뜨거운 슬픔이 차오른다. 이미 현생을 떠난 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지만, 죽음이 과연 해경의 명예를 지키는 마지막 용단일까. 극한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허망하게 꽃다운 삶의 끈을 놓아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남겨진 자의 곡진한 운명은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차오르는 슬픔과 죄책감에 무용할 수밖에 없을 텐데, 버티는 것만이 능사일까. 한 명은 아버지가, 또 한 명은 아들이 짊어져야 할 목숨 값에 대항해야 하는 기구한 고통의 사슬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죄책감이란 단어보다, 죄책감이란 감정의 파고가 하루에도 수천번 씩 마음을 헤집어놓을 텐데, 과연 그 허들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남겨진 자를 향한 지독한 복수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형벌이다. 막내 외삼촌도, 대학교 친구도 그렇게 목숨을 허망하게 버렸다. 희미하지만 여전히 꿈틀대는 마음의 형벌이 지독하게 아프다.  

매거진의 이전글 16년 만의 면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