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사람이 좋더라

만남의 조건값은 나이가 들수록 뾰족해야 한다!

by 라떼파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명제는 디폴트 값이다. 때문에 관계란 모름지기 주위에 포진하는 '양'(量)적인 만남을 기준으로 삼았었다. 쉴 새 없는 술 약속, 의미 없이 오가는 어휘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들, 풍요 속 빈곤의 고착화. 양적인 교류를 통해 부실한 만남의 명세서를 받아 든 순간, 나는 '관계 파산'을 직감했다. 곁을 둘 수 있는 관계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방황의 시기는 길었다. 그나마 친했던 지인들은 하나 둘 결혼이란 제도 속으로 숨어들었고, 뜸해진 연락과 만남 속에 관계는 그렇게 빠르게 휘발되었다.


한편 나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그 단단한 울타리 속에 범위의 확장보다 관계의 깊이를 파는 중이다. 초기에는 불협화음에서 비롯된 다툼이 적잖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였고, 머릿 수를 중시하던 은연 중의 복심이 와이프에겐 적잖은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아이와 성장(?)하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누적되면서, 지금껏 디폴트값으로 헤아린 양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리셋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만남을 가지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떠한 기준을 갖게 되었다.




크게는 세 가지다. 그 기준의 결은 '나'를 향한다. 자존감을 지켜주고 성장을 일깨우는 만남을 원한다. 시시각각 건드리는 감각의 소중함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품격은 지천명을 앞둔 나이에 아름다운 향을 발한다.


첫째는 건강한 토픽이다. 대화의 결이 좋아야 한다. 합이 맞아야 범용의 형이학적 대화 틀에서 벗어나 조금은 고차원적인 형이상학적 주제로 넘어갈 수 있다. 신변잡기 식의 언어와 내용만으로 채운다면 대화가 남기는 뒷맛은 허전하고 심심하다. 나는 구어체에서 벗어나 문어체로 도배되는 말들을 존중한다. 품격이 엿보이고 품위가 돋보이며 품성이 선보인다. 다만 여기서 필수 재료는 말꼴이다. 꼴값이란 표현이 어감적으로 상스럽게 들리지만, 결국 말과 언어의 꼴값이 건강한 관계를 이끈다.


둘째는 좋은 에너지다. 유독 만나면 상성이 좋은 사람이 있다. 이는 기저에 배려가 깔린 사람들이다. 존중과 배려로 만나면 에너지는 절로 넘친다. 그 넘쳐흐른 에너지가 다음을 기약하게 만들고, 그 만남이 거듭될수록 상성은 극강을 이룬다. 존중과 배려라는 기본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파투는 시간문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만났다고 한들,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상처만 가득한 채 끝을 향하기 마련이다. 부부간에 경어를 쓰고,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높임말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배려와 존중을 생활화하면서 그 노력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기 성찰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만남을 잇는 것은 비즈니스만으로 충분하다. 거래처나 회사에서 통제할 수 없는 만남의 경우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악이다. 그 농도를 묽게 만들고, 그 빈도를 최대한 줄이면서, 그 강도를 낮추는 지혜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훅하고 들어올 때 난감할 때가 많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머뭇거리다 오해 아닌 오해를 사게 되고, 이게 또 스트레스로 작용해 무한루프처럼 악순환의 연속을 초래한다. 이럴 경우에는 정중하게 본인의 마음에 최대한 진심을 담아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면 열에 아홉은 더 이상 내 인생의 바운더리 안으로 침입하지 않는다. 이 역시 내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중요한 변곡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거부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자기 성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관계는 행복의 척도다. 서은국 교수가 [행복의 기원]에서 말했듯이, 생존과 진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 '행복'이라고 했다. 그 중심에는 '사회적 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 관계를 어떻게 저울질하고 기준점으로 삼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엇갈린다. 그 감각이 오롯이 내게 전해지고, 좋은 감정의 빈도가 잦다면 행복하다는 방증이다. 반대로 불편하고 어색하면서 짜증의 기운이 시도 때도 없이 내 마음을 노크한다면 불행하다는 뜻이다.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교수가 밝혔듯이 지금은 핵개인의 시대다. 어쩌면 관계의 단절이 당연시되고, 그 단절의 구조적 모순을 칭하는 사회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단면이다. 그렇다고 방관자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관계의 서사를 재정의하고, 어떻게 써 내려갈지가 행복의 척도를 좌우한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관계'를 새롭게 다져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만남의 조건값은 이전보다 훨씬 뾰족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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