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링
온전히, 나의 머리와 손, 펜과 종이로만 구현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보자.
대략 이런 생각으로 손글씨 저널링을 시작했다.
자 그러면 이제 뭐가 필요할까?
실물 노트와 펜이 필요했다.
기존에 가끔, 아주 간헐적으로 끄적이던 노트가 있었지만 마음먹고 손글씨 저널링을 하기로 했으니, 이왕이면 새롭게 출발해 보는 기분으로 새 노트와 펜을 구입하기로 했다.
이제 펜을 고를 차례다.
펜이라고 하면, 내 머릿속에는 으레 18세기 유럽 대저택 서재에서 물결치는 크라밧을 갖춰 입은 말끔한 정장에 콧수염을 섬세하고 뾰족하게 기른 남자가 또는 머리를 가지런하게 묶어 올리고 풍성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정성껏 깃털 펜촉에 잉크를 묻혀 편지를 쓰는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은 2025년 서울.
깃털펜이나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이 고풍스러운 멋스러움이 있겠지만, 사무직 일꾼의 하나로서 분류되는 나는 결국 편의성 측면에서 연필 또는 볼펜을 선택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연필 저널링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연필이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강하니까.
재료가 주는 인상인 것 같기도 하다.
연필은 흑연과 점토, 나무로 구성되어 있으니. 좀 더 자연 재료에 가까울까? 대충 그런 논리였다.
볼펜은 플라스틱과 금속, 오일 잉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연필과 비교하여 좀 더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몇 차례 고민 끝에, 종국에 볼펜을 선택했다.
연필로도 글을 써봤는데, 글자를 써나갈 때 종이에서 연필 특유의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는 것은 참 기분 좋지만. 쓰고 난 다음에 글자들을 보면 아무래도 볼펜에 비교하여 흐릿하고 명료해 보이지 않는다. 지우개를 가져다 대면 금방 흩어져버릴 것 같다. 그에 비해 볼펜은 빈칸에 명징하게 글자가 새겨진다.
연필이 좀 더 인간적이며 덜 기계적인 느낌을 줄 것 같았지만
노트에 명확하게 나의 뜻을 그려보고 싶었기에 결국 볼펜을 선택했다.
다음은, 노트와 펜을 온라인으로 구매할지 오프라인으로 구매할지 선택의 순간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확인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_라는 오래된 습관 때문에 오프라인 구매를 택한다.
찾아보니 반경 1km 내 고층 빌딩 지하 1층에 문구와 식품류를 같이 판매하는 마트가 있다.
점심식사 후에 운동삼아 걸어가 본다.
고층 빌딩 1층 회전문 입구에서 진블루 정장 차림, 경비원이 엄한 표정으로 어디 가시느냐고 묻는다.
내 옷차림새가 아무리 봐도 이 빌딩 직원처럼 보이지 않는가 보다.
얼핏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들 신분증을 목에 걸고 있다.
마트에 입장한다. 우선 볼펜부터 골라본다. 일단 색상 측면에서 검은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잠깐 갈등했지만, 아무래도 역시 습관적으로 검은색을 고르게 된다. 파랑은 검정과 비교하여 왠지 눈에 자극이 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파란색이나 그 외 다른 색깔 볼펜을 사용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다음은 심의 굵기다.
0.3mm
0.5mm
0.7mm
세 가지 종류 중에 고심한다.
0.3mm는 가는 것 같다. 글자가 가늘게 뽑아져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긴장되고 간덩이가 쫄아드는 느낌이다. 샤프펜슬 같은 느낌이랄까.
0.7mm는 굵게 나온다. 거침없이 선을 긋거나 그림을 그릴 때는 좋을 것 같다.
결국 중간 굵기인 0.5mm를 택한다.
이 정도 중간치가 적당할 듯싶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최후의 선택을 위한 판단 기준은 결국 금액이다. 0.5mm 검은색 볼펜은 금액 측면에서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800원 검정 볼펜과 1,200원 검정 볼펜. 800원 검정 볼펜은 나름 날렵해 보이는 외관이었고, 펜촉에 있는 콘(삼각형 모양 앞부분) 부분은 투명해서 볼펜의 볼, 스프링 등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다음 앞부분 바디(몸통)는 불투명했고, 뒷부분 바디(몸통)와 푸시 버튼(누름단추)은 짙은 검은색 플라스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외관을 훑어보고는 거의 800원 검정 볼펜을 선택할 뻔했는데, 갑자기 바로 윗 칸에 1,200원 검정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 1,200원 검정 볼펜은 전체 바디(몸통)가 검정 플라스틱으로 감싸져 있었고, 약간 볼륨감이 있는 것이 800원짜리와 비교해 볼 때 보다 묵직하고 튼튼해 보였다. 800원 볼펜이 슬림한 느낌이었다면, 1,200원은 근육질 이미지였다.
800원과 1,200원은 400원 차이다. 아무래도 1,200원 볼펜이 800원 볼펜 대비 400원 차이만큼의 글자 표기 잉크의 품질이 더 우수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종류 볼펜을 각각 집어서, 마련된 테스트 종이에 살짝 선을 그어보았다. 다시 한번 그어보었다.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볼펜의 외양, 껍데기의 디자인 차이 아닐까 싶었다. 1,200원짜리 볼펜이 조금 더 튼튼하고 마감이 세련되어 내구성이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쩌면 그런 생각은 순전히 1,200원이라는 가격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800원 볼펜을 선택하여 집으로 왔을 때, 1,200원 볼펜을 집어 들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게 될지 아니면 반대로 1,200원 볼펜을 집어 들고 돌아왔을 때, 800원을 선택하는 것이 더 합당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될지 고민되었다. 그깟 400원 차이가 무엇인데 내가 이렇게 선택의 갈등을 하고 있나, 이 문제가 이렇게까지 내가 몰두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최초의 선택은 다음, 그리고 그다음 선택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결국 적지 않은 고뇌의 시간 끝에 800원 검은색 볼펜으로 최종 결정했다. 결정의 배경에는 내가 초보 저널링이스트라는 점이 작용했다. 초심자로서는 겸손한 가격의 도구를 선택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언제가 프로 저널링이스트로 활동하게 된다면 그때 좀 더 상향된 가격의 볼펜을 고려해 봐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