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5. 경험이 주는 소중함
5일 차 80km 마의 롱데이를 뛰기 전날 밤이었다.
오늘은 4일 차 45km였다. 부상으로 인해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야 했다. 절뚝거리며 45도 넘는 사막을 걸으려니 뜨거운 열기에 미칠 것 같았고 마음도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무려 9시간 거려 107명 중 107명, 꼴등으로 들어갔을 때 그 속상함과 답답함, 자존심이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아직도 이날 밤에 고민했던 기억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일은 80KM를 가야 하는데 이 다리로 가능할까, 뛰었다가 불구가 되는 건 아닐까, 여기서 오늘도 침 흘리며 겨우 도착했는데 2배나 되는 거리를 갈 수 있을까.
하.. 진짜 미치겠네. 어떻게 하지..
거센 모래폭풍이 텐트를 휘감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은 변명이었고 이대로 포기할까 말까라는 큰 고민에 빠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단 여기까지 오는데 600만 원의 큰 금액을 사용했고 절대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지만 육체적으로 걷기로 힘드니 정신력으로 40km까지는 기어서 간다고 해도 80km이기 때문에 중간에 한계가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화려하게 반짝이는데 마음 편한 여행자로서 별구경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 다독이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 뛰는 게 아니다.
네팔 아이들, 부모님, 후원해주신 분들, 지인들까지. 일단 내 힘이 다할 때까지 포기는 하지 말자.
그렇게 다음날 시작한 마의 롱데이라고 불리는 5일 차 80KM 코스, 많은 선수들이 45 넘는 사막에 적응 못한 채 탈수 증세를 일으켰고 바위 그늘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탈수 증세를 보였다.
나는 계획대로 꼴등으로 출발했다. 얼굴은 뜨겁게 열이 오르고 땀은 흐르지 않고 일사병 증세처럼 끈적거린다. 5일째 배낭을 메다 보니 어깨는 부어오르고, 숨은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입에 닿아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장비 배낭 때문에 질척거리고, 발등이 부어오르고 무릎 통증과 발바닥이 까졌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도착하면 빨리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 느낌들이 나한테 낯설지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 있을 때 예전에 폭염 속에서 군장을 메고 행군했던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숨이 턱 하고 막힐듯한 지금과 같은 더위, 방탄모 안에 받침대는 다 땀에 젖어 연두색이 짙은 녹색이 되어있었고 30kg에 육박하는 넘는 군장에 가슴이 펴지질 않아 숨쉬기로 힘들었다. K2 총은 정말 길가 논밭에 진흙에 묻어 버리고 싶었고, 발바닥은 전부 다 쓸려서 500원짜리 크기의 물집이 곳곳에 생겼는데 오히려 쉬지 않고 걸어야 통증에 익숙해져서 덜 아플 정도였다. 틈나면 욕하고,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며 신세 한탄했던 행군, 매 순간 포기하고 싶고 온몸에 통증이 있지만 기어코 완주했던 나의 몸이 이 느낌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너무 익숙한 느낌 이만 다른 선수들은 낯선 느낌, 그렇다면 내가 남들보다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있었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라잡기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싫어하고 이해 못 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작은 경험이 2년 후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이 됐다니. 이때 처음 깨달았다.
내 인생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쓸모없는 경험은 없구나!
그 외에도 처음 중국에 와서 영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일, 환승 편 비행기를 놓칠뻔한 일, 비행기는 간신히 탔지만 결국 기차는 놓치는 바람에 다음 기차를 타야 했던 일, 중국 마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하미 전통의 양 꼬치를 먹었던 것, 40개 다른 국적의 외국인들과 이제는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된 것, 일주일 동안 씻지도 못하고 다 함께 텐트 안에서 동고동락 한 나날들, 정말 숨이 턱 막힐 듯 멋진 중국 고비사막과 초원을 보고 또 그곳을 달렸다는 것, 250km를 떠돌이 강아지 ‘고비’와 함께 뛰었던 일, 중국의 각종 음식들을 먹어본 것, 버스에서 강남스타일이 나와 나 혼자 외국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춤췄던 기억, 사랑하는 우리 한국 팀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일 등
이러한 작고 사소한 경험들까지도 훗날 성공적인 나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언제 중국의 광활한 고비 사막을 뛰어볼까? 언제 한 번 눈빛으로 통할 수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어볼까? 언제 식량, 침낭을 메고 7일간 뛰어볼 기회가 있을까?
남들은 미쳤다고 사서 고생하러 가냐고 의아해했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썼고 이 경험을 통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패한 순간, 도전했던 순간, 성취했던 순간 등 모든 경험이나 느꼈던 감정들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악한 행동을 제외하고는 누가 무엇을 하든지 ‘이것이 잘못됐다, 틀린 길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나 또한 나의 가치관을 기준해서 ‘저건 좀 아니다, 잘못됐다’라고 상대방에게 말했던 것에 반성한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하루에 SNS에 수십 개씩 좋은 글이 올라온다. 인맥관리 노하우, 매력 있는 사람 되는 방법, 20대에 후회하지 않기 위한 것 등 SNS를 하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머리로만 좋은 글들을 알고 있었고 수박 겉핥기식의 좋은 글들을 타인들들에게 이야기한 적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느낌을 말해준다고 할까나, 마음 한구석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직접 부딪치며 느꼈던 경험의 소중함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앞으로도 얼마나 멋진 경험들을 하게 될지 나의 미래가 정말 기대된다.
그렇게 나는 행군이라는 경험으로 50도의 뜨거운 사막을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