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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호 Oct 21. 2021

흔적의 사유와 표기에 대한 성찰

데리다의 『문자학에 대하여』 1부 「글자 이전의 표기」 연구 발표문

본문: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43fe1da8daf3a222ffe0bdc3ef48d419


  이 논문은 자크 데리다의『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1부 「글자 이전의 표기L'écriture avant la lettre」에 대한 한 독해의 시도다. 나는 데리다의 이 글이 매우 중요하고 그의 사상을 대표하며, 또 유명하지만 그것에 대한 착실하고 종합적인 독해의 결과물을 찾을 수 없다는—적어도 한국에서—판단과 함께, 나의 논문을 용기를 가지고서 내놓았다. 난해한 내용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 주제화, 몇몇 낱말에 대한 번역어 선택에는, 그리고 그것들을 대저 후학들에게 특히나 고약한 아카데미에 내놓는 것에는,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아래의 글은 비교적 간단히 읽을 수 있는 발표문(2021년 4월 30일 부산대학교 철학과 논문 발표회 발표문 약간 수정)이다.




흔적의 사유와 표기에 대한 성찰: 데리다의 『문자학에 대하여』 1부 「글자 이전의 표기」 연구 발표문


박지호


  철학은 다른 과학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소위 만학의 여왕이라 불렸다. 그러나 현대 철학사를 다루는 책에 등장하는 철학 자체에 대한 회의의 태도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가장 먼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 회의가 품고 있는 기분이나, 그것이 구체화되는 양상이 다를지라도, 이 같은 회의의 태도는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철학의 지위가 그러한 회의는 사치스러운 것일 처지에 있다고 말해야 할까? 어떻든, 그러한 사상사적 흐름 중에, 데리다는 철학을 회의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사유 노선을 개척한 또 하나의 철학자, 아니 그 자신 철학자라는 말보다 우선 사유가라는 말을 선호하는바, 한 사유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유가는 『문자학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사유를 흔적의 사유la pensée de la trace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것과 결부되어 진행되는 자신의 작업을 ‘표기écriture(문자gramme)에 대한 성찰’이라고,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문자학’이라고 했다. 물론 이 문자학은 십중팔구 우리가 그 이름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데리다가 개방하는 문자학은 이러저러한 영역적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그 발전을 억압해온 것인 동시에 데리다로 하여금 철학에 대한 상대화와 국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자, 데리다의 입론(『문자학에 대하여』 1부 「글자 이전의 표기」) 와중에 가장 광대한 장을 망라하는 도래할 ‘과학’의 다른 이름이고, 또 그런 ‘과학’을 향한 사유의 실천 자체로도 전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이른바 ‘해체의 철학자’인 데리다가, 여느 통념과 달리, ‘흔적의 사유’, ‘표기에 대한 성찰’ 그리고 ‘문자학’이라는 이름 아래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만학의 여왕 자리를 탈취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데리다의 철학에 대한 회의는 풀이 죽은 기분으로 수행되는 것도, 원한이 깃든 부인否認도 아니다. 차라리 지극히 모험적이며 야심에 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발표는 본 발표자의 논문에서 주제화된 『문자학에 대하여』 1부 「글자 이전의 표기L'écriture avant la lettre」의 이하 세 주제를 간략히 제시하면서, 그 야심의 윤곽만을 그려 볼 것이다.


1. 흔적의 문제계


  왜 표기인가? 왜 문자학인가? 왜 이것들은 데리다에게 물음이 대상이 되는가? 왜냐하면 흔적의 문제계의 장소에서 이것들이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우선 먼저 ‘흔적’은 데리다의 일종의 ‘시대의식’을 압축하는 말이다.


  진리라고 말해지는, 충만한 발화parole의 의미를 환원하거나 복원하는 데 유념하기 전에, 의미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것이 흔적trace의 문제계의 장소lieu다. [...] 이 관념은 [...] 존재의 의미를 현전으로 그리고 언어의 의미를 발화의 충만한 연속성으로 규정했던 존재론의 뒤흔들림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근접성의, 직접성의, 현전의(현전에 가까운 것, 고유한 것 그리고 선先-적인 것le pré-) 이름들 아래 이해한다고 믿는 것을 수수께끼와 같이 만든다는 것, 이런 것이 따라서 현재 시론의 궁극적인 의도일 것이다. 이 현전의 해체는 의식의 해체를 경유하고, 따라서 그 관념이 니체의 담론 속에서 또 프로이트의 담론 속에서 나타나는 바대로 흔적(Spur)의 환원 불가능한 관념을 경유한다. 끝으로, 과학의 모든 장 속에서, 그리고 특히 생물학의 그것 속에서, 이 관념은 오늘날 지도적이고 확고부동하게 등장한다.(GR, 102-103)


  흔적의 문제계의 장소는 차이 속에서 의미와 그 기원에 대해 묻는 곳이고, 그 곳은 충만한 발화의 의미를 다루는 것에 앞선다. 주지하다시피, 데리다가 보기에 충만한 발화는 서양의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 및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e의 기원, 현전 및 표음적 표기(표음문자)의 형이상학의 진리의 기원이며, 이러한 바는 서양의 사상가들이 표기를 비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흔적 개념을 통해 그가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현전에 의해 포괄될 수 없는 어떤 차원(비-현전)과의 관계다. 그리고 “현재의 시론”, 즉 『문자학에 대하여』의 “궁극적인 의도”는 “사람들이 근접성의, 직접성의, 현전의 이름들 아래 이해한다고 믿는 것을 수수께끼와 같이 만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현전의 해체이다. 의미와 그 기원을 문제화하는 흔적의 문제계의 장소에서 비로소 존재론과 그에 결부된 존재 이해, 언어의 의미 그리고 의식(목소리의,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는 것의 경험)의 해체라는 거대한 문제들이 현전의 해체라는 말로 요약되고 물음에 부쳐지는 것이다.

  데리다는 흔적의 문제계의 장소에서 그 자신이 로고스의 시대, 역사적-형이상학적 시대, 존재론-신학의 시대 등으로 지칭하는, 약 2천년의 음성 중심적이고 로고스 중심적인 어떤 한 시대의 역사적인 폐막/울타리clôture—종말fin은 아닌—을 그리고 다가올 세계와 시대를 가리키고자 한다. 그리고 그 로고스의 시대 속에서 표기의 표음화, 형이상학, 은유의 교란, 신학에 의해 구속되고 억압된 표기 개념과 표기의 과학, 곧 문자학에 대해 성찰하고자 한다. 데리다에게 흔적(그리고 差弛; différance)은 원-표기와 동일시된다. 왜 데리다는 표기를 흔적의 다른 이름으로 지목했는가? 흔적을 환원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에서 표기는 기의에 가까운 기표인 목소리의 대리보충일 뿐이라고, 그런 식으로 ‘기호의 기호’ 혹은 ‘기표의 기표’일 뿐이라고 비하되어왔다. 주체에 현전하는 의미를 표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표기는 충만하고 연속적인 목소리를 재단하는 차이 혹은 불연속이며, 지시대상과 서명자가 부재하는 것이다(읽는 주체와 문맥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한에서만 데리다에게 표기는 흔적의 다른 이름이, 원-표기가 된다. 흔적의 사유가 표기에 대해 성찰하고, 문자학이 한낱 영역적인 존재론과 과학을 벗어나게 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흔적의 문제계의 장소에서 ‘기호의 기호’ 혹은 ‘기표의 기표’를 읽는다면, 그것은 언어의 운동, 기호 일반의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 된다. 표기는 기표들의 참조의 놀이가 되고, 여기에서 기의는 언제나 이미 하나의 기표로 기능한다. 이는 초월론적 기의가 부재함을 의미한다. 이 놀이는 세계 속의 한 놀이가 아니라 세계의 놀이다. 데리다의 표기에 대한 성찰 속에서, 로고스에 종속되었던 ‘합리성’, ‘과학성’ 따위는 표기 수준의 수학적인 형식성을 포괄하는 ‘메타-합리성’, ‘메타-과학성’으로 확대되고 발본화된다.


2. 일반언어학 탈구축을 통한 일반문자학의 개방


  로고스에서 풀려난 메타-합리성 혹은 메타-과학성을 담지할 것인 표기의 과학, 문자학, 데리다가 그 문자학을 개방하는 것은 그것을 억압하고 있는 로고스의 현대 과학인 일반언어학을 탈구축하면서다.

  소쉬르는 발화와 표기 사이의 관계들을 이론적이고 실천적으로 규제하는 서양의 전통을 따른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규정되었던, 편협한 표기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계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목소리는 기표 중의 기표이고, 표기는 그 복사물인 기표의 기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목소리에 의해 발신된 소리들은 영혼의 상태들의 상징들이고, 쓰인 낱말들은 목소리에 의해 발신된 낱말들의 상징이다.”(GR, 46에서 재인용)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체langue는 표기에 독립적인 구두의 전통을 갖”으며, “언어language와 표기는 서로 구별되는 기호들의 두 체계”이고, “후자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전자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표음적 표기에 한에서만 성립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표기의 특정한 유형의 모델을 반영한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 사실로부터 언어학의 기획과 대상을 정의한다.


  언어학의 대상은 쓰인 낱말과 발화된 낱말의 조합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 이 후자는 그 혼자서 대상을 구성한다.(CLG, 46)


  위의 정의에서 언어학의 대상은 낱말만으로, 그것도 발화된 낱말만으로 정립된다. 소쉬르에게 낱말은 ‘생각-소리pensée-son’가 분할들을 함축한다는 사실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와 소리, 개념과 목소리, 기표와 기의의 통일체unité다. 이에 따라 이미 구성된 기표작용signification의 단위unité인 낱말의 특권으로부터 발화와 표기의 관계가 결정되어 버린다. 표기는 음성 중심적으로 생각되며, 언어와 ‘생각-소리’의 외부적인 재현이 된다. 그러나 이때 표기 개념은 여전히 표음적 표기의 모델에서 생각된다. 표음적 표기는 표기의 하나의 특정한 유형일 뿐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구두의 언어체에 대한 경험적으로 규정되고 실천된 분할들에 순응하는 것이다. 일반언어학에서 발화와 표기 사이의 관계는 표음적 표기의 사실로부터 규정된다.

  소쉬르는 또한 표기에 대한 재현주의를 지탱하는 표기 자체에 대한 구획을 도입했었다. 그것은 표기가 구두의 언어에 대한 재현의 체계이고, 낱말들을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과 낱말들을 구성하는 소리를 내는 요소들을 재현하는 것으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표기의 두 체계만 있다: 1. 표의적인 체계. 그 속에서 낱말은 한 유일한 기호에 의해 재현된다. 그리고 그 한 기호는 그것이 조립되는 소리들에 낯설다. 이 기호는 낱말의 일습一襲; ensemble에 관계되고, 따라서, 그것이 표현하는 관념idée에 간접적으로 관계된다. 이 체계의 고전적인 범례는 중국의 표기이다. 2. 낱말 속에서 잇달아 오는 소리들의 잇달음을 재생산하기를 겨냥하는, 보통 이른바 ‘표음적’ 체계. 표음적 표기들은 때로는 음절에 의거하고, 때로는 알파벳에 의거한다. 말하자면, 발화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들에 기초를 둔다. 하기야 표의적인 표기들은 쉽게 혼합물들이 된다: 최초의 가치로부터 방향이 바뀐 특정한 표의문자들은 마침내 고립된 소리들을 재현한다.(CLG, 47)


  두 표기의 체계는 모두 미리 구성된 기표작용의 단위인 낱말에 대한, 구두의 언어에 대한 재현이다. 그리고 소쉬르는 이 구획 위에 또 다른 하나의 구획을 도입한다.


  우리는 우리의 연구를 표음적 체계에, 그리고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 오늘날 사용되며 그 원형原型; prototype이 그리스 알파벳인 것에 한정한다.(CLG, 48)


  쓰인 낱말이 아닌 발화된 낱말이 언어학의 대상을 구성한다는 소쉬르의 언급과 이 두 구획은 『일반언어학 강의』의 서론의 6장 「표기에 의한 언어체의 재현」(데리다가 집중하고 있는 텍스트)에서 인용된 것이다. 길지 않은 서론에서 꽤나 분량을 차지하는 이 6장의 기능은 무엇일까? 이 6장 이전에 『일반언어학 강의』의 소쉬르는 언어학의 간략한 역사, 언어학의 주제와 과제, 언어학의 대상, 언어학의 내적 요소들과 외적 요소들에 대한 구분을 다뤘었다. 이 구획들이 등장하는 순간은 내적 언어학의 경계를 설립하려는 소쉬르에게 시의적절한 것이다. 언어학은 과학이 되기 위해서 엄격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소쉬르는 표기가 언어체의 내적 체계에 낯설다고, 표기는 언어체의 형상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체계의 내부성에서 표기를 배제할 권리를 갖게 된다. 표기에 대한 재현주의적인 개념은 이른바 내적 언어학의 장을 구성하는 것을 촉진시킨다. 소쉬르는 언어의 안쪽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언어학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성하는 것이다. 마치 실재성과 이미지, 현전과 재현 등의 서양 전통의 이항대립적 관계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중에 생각-소리를 잘 재현하는 표음적 표기는 소쉬르에게 특권적인 것이 된다. 그에게 있어 표음적 표기는 언어체의 내적 체계를 존중하고 보호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쉬르의 구획들은 ‘합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데리다가 볼 때, 이는 단지 플라톤이 이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에피스테메와 로고스를 같은 가능성 속에 잇는 것과 같이, 그런 와중에 발화와 표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부심하고, 표기를 규탄하는 것과 같이, 철학적인, 인식론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들일 뿐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표기는 언어의 내적 체계에 외적이고 돌발적인 사고事故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소쉬르는 부심腐心하지 않을 수 없다.


  표기는 그것 자체로 내적 체계에 낯섦에도 불구하고, 언어체가 끊임없이 형상화되는 방법을 빼고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 방법에 대한 유용성, 결함들 그리고 위험들을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CLG, 44)


  소쉬르에게 표기는 언어체의 안쪽과 관련하여,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만, 외부적이고 인공적인 위험한 도구요, 기술이다. 그것으로부터 언어체의 내적 체계를 보호하고 복원하는 것이 소쉬르에겐 중요하다. 표기는 내적 체계를 위협하고 변질시킨다. 소쉬르는 표기를 단지 외적 역사, 표시법notation, 돌발적인 사고事故로 간주하고 싶어 하고, 도덕가 혹은 설교자의 어조로 규탄하고, 이론적인 오류나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죄로 여긴다. 흔히 정념 속에서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자연적인 관계의 역전으로 정의되는 죄로 말이다. 서양의 전통 속에서 감성적인 표기, 글자, 기입은 육체로, 그리고 언제나 영혼, 숨, 말verbe과 로고스에 외부적인 물질로 간주되었던바, 소쉬르는 발화와 표기 사이의 자연적인 관계의 역전을 고발한다. 이때 표기는 영혼의 내부성, 참된 로고스 속에서의 영혼의 자기 자신에로의 살아있는 현전, 발화의 자력갱생에 상처를 내는 안쪽 속에서의 바깥쪽의 침공이다. 사실은 돌발적인 침공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일어났던 침공. 사실은 발화의 폭력에 선행하는 ‘자연적’이고 ‘기원적인’ 폭력. 그러나 소쉬르에게 안쪽 속에서의 바깥쪽은 단순한 외부성으로 치부된다. 소쉬르에게 표기는 ‘이미지’, ‘형상화’, ‘재현’, 외적인 역사로 밀려나야할 것, 언어체의 시각을 가리는 죄가 있는 가장假裝, 푸닥거리가 필요한 악, 부마付魔하는 유령이다. 현대의 로고스의 과학으로서 언어의 과학은 발화와 표기 사이, 안쪽과 바깥쪽 사이의 관계들에서 자연적인 기원의 순수성을 되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서양의 역사적-형이상학적 전제를 따라 기의와 소리의 기표의 자연적인 유대 관계로부터 발화에 대해 표기를 종속시키는 자연적인 관계를 조건 짓는다. 이 자연적인 관계가 바로 표기의 기원적인 죄에 의해 역전되었을 관계다. 소쉬르에게 언어 기호들signe linguistique과 기록법 기호들signe graphique 사이에는 자연적인 관계들이 있다. 소쉬르: “기록법 이미지는 마침내 소리에 피해를 입혀가며 강요된다... 그리고 자연적인 관계는 전도된다.”(CLG 47) 전도를 야기하는 것은 표기의 용이함이다. 이 용이함에 굴해서 죄가 생겨난다.

  언어체 일반의 내적 체계 일반에 관한 일반언어학의 기획은 표기의 특수한 한 체계(표음적 표기)를 외부로 배제하면서 그것의 장을 그리고 있다. 마치 표음적 표기가 표기 일반 혹은 적어도 표기의 텔로스인 듯이 간주하고서 말이다. 이는 어떤 위기를 지양하면서 자기 자신에로의 충만한 현전을 꿈꾸는 발화의 역사적인 폭력(그러나 표기의 ‘기원적인’ 폭력에 비하면 부차적인)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 발화의 자가-생산은 바로 로고스다. 발화는 쓰인 담론 위에 자신을 드높이면서, 자신의 타자를 내쫓으면서 스스로를 지킨다. 그러나 표음적 표기라는 특수한 모델은 실존하지 않고, 그것의 원리는 어떤 실천에도 순수하게 충실하지는 않다.

  소쉬르가 창건한 일반언어학은 역사적-형이상학적 전제에 따라 미리 규정된 언어학적인 모델들로부터 그 안쪽과 바깥쪽을 정의하는 한, 일반적이지 못하다. 표기의 체계 일반은 언어체의 체계 일반에 외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표기의 찬탈은 돌발적인 사고로 말미암은 착오가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에게 찬탈은 한 깊은 본질적 가능성(비-직관의 본질적인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참조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출발해야 하는 것은 이 본질적 가능성으로부터다. 소쉬르에게 언어체의 체계와 표음적 표기는 표기의 텔로스로 간주된다. 이 목적론은 표기 속에서의 비-음성적인 것의 침공을 일시적이거나 돌발적인 사고로 해석하도록 향도한다. 그런 중에, 소쉬르는 표기의 찬탈과 올가미가 어떻게 가능했었는지에 대해, 정념들과 상상력의 심리학으로 대답하고 있다. 이는 음성과 의미 사이의 유대를 확언하는, 직관적인 의식(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는 것의 경험)의 심리학에 다름 아니다. 소쉬르는 목적론적으로 비-직관을 위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직관적인 체계의 놀이가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발화와 표기 둘 모두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원-표기다. 소쉬르의 자의성 테제와 차이 테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소쉬르는 표기를 언어의 바깥쪽으로 쫓아냈지만, 몇몇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표기를 언어체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비교 항으로 간주했다.1)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표기는 단지 언어체의 비교 항인 것이 아니라, 언어체가 표기의 한 종류이다. 아니, 언어체는 “보다 정확히 말해, 관계들이 더 이상 여기에서 외연과 경계로부터 기인하지 않기 때문에, 표기의 일반적인 가능성 속에 설립된 한 가능성”이다(GR, 75). 데리다가 말하는 기원적인 표기는 (세계 속의 한 놀이가 아니라) 세계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기와 언어체의 관계를 표음문자의 형이상학을 따르는 전도된 방식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소쉬르의 ‘표기의 찬탈’인 것이다. 이 기원적인 표기, 원-표기를 다루는 과학이 바로 데리다가 개방하는 일반문자학이다. “발화 이전의 그리고 발화 속에서의 표기의 과학, 문자학은 그리하여 가장 광대한 장을 망라할 것이다.”(GR, 74) 이 도래할 문자학은 아직 실존하지 않지만, 실존할 권리를 갖는다. 언어학은 이 일반적인 과학의 부분일 뿐이고, 문자학이 발견할 법칙들은 언어학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문자학의 개방은 언어학에 예속돼 있던 기호학의 기획 자체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문자학의 (불)가능성과 문자학적 실천


  그렇다면 이러한 표기의 과학인 문자학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표기 과학과 철학의 구성은 필요하고 어려운 과제다.”(GR, 142) 아니, 사실상 적어도 온전하게는 불가능하다. 이는 에피스테메(과학, 철학)를 벗어나는 범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에서 문자학은 가능한가? 그것의 근본적인 조건은 물론 로고스중심주의의 요동搖動; sollicitation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의 조건은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것은 사실 또한 과학의 개념을 뒤흔들 위험이 있다.”(GR, 109) 에피스테메의 한계 속에서의 표기 과학으로서 문자학은 “여전히 현전 속에 갇힌 것으로 머무”는 것이다.(GR, 142)

  그렇다면 대관절 흔적의 사유가가 표기에 대해 성찰하면서 계속해서 하는 일 혹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과학과 철학의 “한계들에 이르러 그리고 그것들을 쉼 없이 반복해서 다루면서, 흔적의, 差弛의 또는 유보의 사유는 또한 에피스테메의 장 너머를 가리켜야 한다.”(GR, 142) 흔적의 사유 속에서 그리고 표기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이제 문자학은 설립된 또는 설립되어야 할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흔적의 사유의 발걸음 자체에 다름 아닐 어떤 사유의 실천으로 전치된다. “문자학은 과학성의 개념과 규범들을 존재론-신학,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와 묶는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이는 과학의 고전적인 기획에 대한 위반이 전-과학적인 경험주의로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피해야 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작업입니다. 그 점은 문자학적 실천pratique grammatologique 속에서의 일종의 이중 기재double registre를 전제로 합니다: 형이상학적인 실증주의 혹은 과학주의의 너머로 가야 함과 동시에 그리고 과학의 실질적인 작업들에서 그 기원에서부터 그 정의와 운동을 짓누르는peser sur 형이상학적 저당물들hypothèques로부터 그것을 자유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자학이 하나의 ‘과학’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없습니다. 나는 한마디로 그것이 과학을 기입하고 그 한계를-설정한다/한계를 이탈한다dé-limiter고 말하고 싶습니다 ; 그것은 그것의 고유한 표기[글쓰기] 속에서 과학의 규범들을 자유롭고 엄격하게 기능하게 해야 합니다 ; 다시 한번 말해, 그것은 고전적인 과학성의 장을 울타리 짓는 경계를 표시하고 동시에 느슨하게 합니다. [...] 문자학은 의심할 나위 없이 또 다른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잘 규정된 새로운 내용을, 새로운 분야를 담당하는 새로운 교과목이 아니라, 이러한 텍스트 분할의 세심한 실천일 것입니다.”(P, 48-50) 에피스테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전前비판적인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불편한 거동, 번거로운 이중 기재. 이것이 흔적의 사유의 한 걸음이다. 이를 보며 우리는 철학이 아니라 흔적의 사유의, 철학자가 아니라 한 사유가의 끝없는 방황과 모험을 예감하게 된다.


주석


1) "사람들은 표기인 기호들의 이 또 다른 체계 속에서 동일한 사물의 상태를 확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 물음 전체를 명석하게 하기 위한 비교의 항으로 간주할 것이다. 사실상: 1. 표기의 기호들은 자의적이다 ; 예를 들어, t라는 글자와 그것이 지칭하는 소리 사이의 어떠한 관계도 말이다 ; 2. 글자들의 가치는 순수하게 부정적이고 차별적이다 ; 따라서 한 같은 인격은 t를 ե t է 와 같은 변이체들로 쓸 수 있다: 본질적인 유일한 사태는 이 기호가 그것의 필체하에 l, d 등의 기호와 혼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3. 표기의 가치들은 규정된 얼마간의 글자들로 이루어진, 정의된 한 체계의 한 가운데에 그것들의 상호적인 대립을 통해서만 활약한다. 이 특징은, 두 번째의 것과 동일하지 않고, 협소하게 그것과 묶이는데, 왜냐하면 둘 모두 첫 번째의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록법 기호는 자의적이기 때문에, 그것의 형식은 거의 중요하지 않고, 보다 정확히 말해 체계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속에서만 중요성을 갖는다. 4. 기호의 생산의 수단은 전적으로 아무래도 좋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체계의 관심을 끌지 않기 때문이다(이점은 또한 첫 번째 특징에서 유래한다). 내가 글자들을 하얗게 혹은 검게 쓰든, 음각으로 쓰든, 혹은 양각으로 쓰든, 펜으로 혹은 끌로 쓰든, 그 점은 그것들의 기표작용에 중요성이 없다.”(CLG,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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