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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호 Jun 19. 2022

아포리즘 3

2022.5.15~2022.6.21

지배적인 억견을 반복하거나 정당화하는 지식인을 보면 의심스럽게 마련이다.(2022.5.15)


오늘날은 얼핏 구태의연해 보이는 것들—충실성, 순애보, 종교성, 존경심, 진리 탐구 등—이 혁명성을 띤다.

(2022.5.16)


가짜배기가 전위의 이름을 참칭하는 것을 방기한다면 우리는 전위는커녕 반동을 막을 명분마저 잃게 된다.(2022.5.22)


자폐적인 상상을 타인에게 투사하거나 그것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유아적이지만 비근한 방어기제다.(2022.5.24)


인간은 상대방이 악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때 자신이 상징적으로는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2022.5.25)


어떤 욕망의 대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욕망을 상실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면 어쩔 것인가?(2022.5.29)


자신의 스윗한 상징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도리어 자식의 성장을 막는 아버지상, 이것이 근래의 가부장이다.(2022.6.1)


각 시대의 기저 분위기가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망각되고, 그 망각의 사실마저 망각된다.(2022.6.1)


선택의 선택,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선택은 가능한 모든 숙고에도 남은 어떤 잔여 앞에서의 미칠 듯한 결단이다.(2022.6.3)


천둥벌거숭이는 당신의 깊이나 품위를 모르고, 가스라이터는 그것들을 시기하는바, 이 둘은 곧잘 유착한다.(2022.6.4)


어떤 집단에서든, 자체로는 경쟁력 없는 자들이 충성 경쟁에 돌입하고 권위주의, 진영논리와 유착하는 것이리라.(2022.6.6)


우리 삶의 어떤 원초적 우연성, 내던져져 있음의 상태가 우리에게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보장한다.(2022.6.7)


필시 근래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의 전면화는 계급 투쟁이 쇠락하고 계급 갈등이 은폐된 결과이기도 할 터이다.(2022.6.8)


자주 수다스러움은 침묵 속에서 찾아오는 잔혹한 어떤 진실을 부인하기 위한 부산스런 제스처다.(2022.6.9)


개인적으로도 지난 몇 년간 뼈저리게 느낀 바, 정치권력의 성격과 시민들의 품행은 놀랄 만큼 맞물려 있다.(2022.6.10)


대저 독단적인 사람일수록 자신의 허물이 드러날 때는 순식간에 상대주의자가 되어버린다.(2022.6.11)


이미 배제되어버린 자는 외면하면서, 몫 있는 자의 과장된 상처 고백에만 공감하고 몰입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2022.6.12)


어떤 사태의 윤곽이 말갛게 드러날 때까지는 지그재그식의 고된 표류의 경험—소위 변증법적 경험—이 필수적이다.(2022.6.13)


쩨쩨한 시기심을 극복하는 발본적인 방법은 역사와 이념적인 것까지 숙고하는, "그릇이 큰" 삶을 사는 것이다.(2022.6.14)


참된 삶의 비전이 사라지면 보신주의, 모리배들, 가짜배기들이 활개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2022.6.15)


윤리의 윤리성을 따져 묻는 해체적, 창조적, 종교적 제스처, 이것이 궁극의 윤리고 궁극의 정치적 실천이다.(2022.6.16)


자신의 허물을 상대방의 것으로 투사하는 방어기제는 황당하지만 비근한 것이다.(2022.6.17)


패악질을 했던 자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왜 그 짓을 안 하겠는가? 행적을 어물쩍 넘기게 두면 안 된다.(2022.6.18)


여전히 부르주아가 환경 얘기, 성차별 얘기 좀 하면 소위 교양층 진보 좌파의 총애를 받는다. 통탄할 일이다!(2022.6.19)


아상我相 따위가 아니라 죽음의 단독성이 바로 개인의 단독적인 꿈, 사랑 그리고 삶을 가르치는 것 아닌가.(202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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