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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호 Sep 10. 2022

아포리즘 6

2022.8.17~2022.9.10

오늘날 미디어와 그 동업자들은 선정성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형태로 그것들을 전시, 재생산하는 방식에 능숙하다.(2022.8.17)


서로 사생활을 관람하면서 참견하는 쇼의 범람: 공적인 시공간의 소거; 응시를 통한 상호 구속.(2022.8.18)


배운다는 것은 반복 가능한 것을 시차一이 말의 중의적인 의미에서一와 함께 되풀이하는 것 아닌가?(2022.8.19)


어떻든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다가오는 미래와 우리의 단독적인 삶을 살아본 일은 없다.(2022.8.20)


우리 모두가 악하다는 반성적 자조는 진짜 해로운 자들에게 알리바이를 준다. 이는 시비지심의 방기와도 같다.(2022.8.24)


공감과 연민은 다소 자의적이고 편파적이기에 얼마간 해로울 수 있다. 의무감이야말로 정의의 감정적 동인이다.(2022.8.27)


소비자 주도의 문화 산업과 통신 매체의 발달은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을 끝 간 데를 모르고 배가시키는 듯하다.(2022.8.29)


'성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무가 될 것이다!'라는 문화 산업의 겁박이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2022.8.30)


낯선 것들이 우글거리는 저잣거리 같은 곳에서만, 무균실과 자궁 바깥에서만 새 사유가 맥박친다면 어쩔 것인가?(2022.8.31)


주체의 자기 초월로부터, 즉 우리가 평등하게 선고 받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현기증이 실재한다. 도처에 있다.(2022.9.1)


통념과 반대로, 사회적 요구에 맞춰 자기 초월적 욕망을 회피했을 때 느끼는 정념이 죄책감이라면 믿겠는가?(2022.9.2)


자기 초월적 주체를 목도할 때면 자괴감을 감추는 질시를 통해 우리 안의 보수성이 고개를 쳐들곤 한다.(2022.9.3)


마녀 재판이란 멋대로 유죄 추정을 해놓고서 외려 상대방에게 무죄 입증 책임을 요구하는 것一흔한 일一일 테다.(2022.9.4)


특정 타인을 완전무결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그 자신의 유아적 전능감의 투사다. 전도된 나르시시즘인 것이다.(2022.9.5)


숙고 없는 행위와 비평만 있는 비행위 다 무책임하다. 숙고, 행위, 그 용서, 그 한계 수용까지 가야 한다.(2022.9.6)


인디언 기우제식 의혹에 변론할 시간은 없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 무리한 의혹 배후의 관심을 추궁해야 한다.(2022.9.7)


입증 혹은 설명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그 요구가 정당할 때다. 헛소리는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2022.9.8)


어떤 일에 대해 입증 혹은 설명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데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황당한 경우가 흔히 보인다.(2022.9.9)


사랑과 혁명은 우리에게 그 배경을 재고 따지는 데 필요한 심적 거리를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것처럼 진행된다.(202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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